[횡설수설/김순덕]직업정신

  • 입력 2006년 6월 27일 03시 00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얼굴 주름살을 없애는 데 쓰이는 보톡스를 성형수술용으로 승인한 2002년. 영화 ‘물랑 루즈’의 감독 바즈 루어만이 보톡스를 맞아 팽팽해진 여배우를 출연진에서 빼버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안면근육이 굳어져 희로애락 표현이 안 됐기 때문이란다. 더 예뻐지고 싶은 여자로서의 욕망과 배우라는 직업이 충돌한 셈이다. 물론 더 좋은 연기를 위해 보톡스를 맞았을 수도 있지만.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배우 김성기(45) 씨가 연습 중 쓰러졌다.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다. 무대 위 긴장 속에서 감정의 극단을 오르내리는 연극배우 중엔 유독 고혈압이란 ‘직업병’을 지닌 이가 많다. 고혈압 약을 먹으면 연기에 몰입하기 어렵다며 약을 끊는 배우도 적지 않다. 교감신경을 억제해 혈압을 떨어뜨리고 편안하게 해주는 고혈압 약이 연기엔 되레 독(毒)이라는 것이다. 배우로서의 치열한 직업정신이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누른 경우다.

▷“왜 나지? 왜 나여야만 하지?” 연극 ‘에쿠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과 의사인 다이사트는 묵직하게 내뱉는다.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고뇌의 표현이다. 2004년 다이사트 역으로 무대에 섰던 김흥기(58) 씨도 공연 뒤 분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남보다 4시간 일찍 나와 하루 7∼8시간씩 연습했을 만큼 열정적이었던 그다. “왜 나지?”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그들은 무대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해왔다.

▷배우(俳優)에서 ‘배’자(字)가 ‘사람(人)이 아니다(非)’라는 뜻의 조합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목숨 걸고 일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사람 아닌 사람’들도 자신의 일을 더 잘하려고 복용하는 약까지 끊는데, 국민의 목숨을 좌우하는 일을 너무 가볍게 해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재미없게 한다. “세금 폭탄 아직 멀었다” “세종대왕이 와도 불가능하다”는 정치무대 사람들 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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