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속지 않는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이유와 목적은 단 한 가지, 권력 독점밖에 없다. 검열에 대한 세계적 전문가 마이클 스캐멜이 진작 꿰뚫어보고 일갈했다.
신문은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사회정의(正義)에 맞게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언론관이다. “일부 신문이 친(親)기업적, 색깔 시비 보도 등으로 공론장 기능을 못 한다”며 이른바 ‘신문개혁’에 앞장섰던 최민희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의 주장과 일치한다. 같은 배를 탄 열린우리당 김재홍 의원도 언론의 본질은 공공성과 다양성이라고 했다(‘신문과 방송’ 5월호).
천만의 말씀이다. 언론의 본질은 국민을 대신해 정부를 감시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 1644년 ‘스파이’라는 초창기 영국 신문은 “왕궁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게임의 거짓을 밝히는 것이 사명”이라고 했다. 친(親)정부 세력이 주장한 공공성과 다양성은 정권의 안녕을 위한 공공성, 다양성일 뿐이다.
헌법재판소의 신문법 핵심 조항 위헌 결정은 민주화세력을 자처하면서도 전체주의적 억압을 획책한 노 정권의 본질을 확인시켰다.
싫은 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걸 못하게 할 힘이 권력자에게 있다. 권위주의 정권이 주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봉쇄한다면, 전체주의 정권은 리더의 가치관과 이데올로기에 안 맞는 보도까지 검열 대상으로 삼는다.
노 대통령은 “처음 언론과의 갈등은 국회의원 되기 전 가치의 충돌이었다”(2003년 8월 2일), “서울 한복판에 빌딩 가진 신문사가 행정수도 반대 여론을 주도한다”(2004년 7월 8일), “정부의 정책홍보시스템이 정보시장에 변화를 가져올 것”(2006년 6월 2일)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신문시장의 새 판을 짜려던 시도가 어제 본색만 드러낸 채 좌절된 것이다.
‘노 정권의 패러독스’는 이뿐만이 아니다. 주류세력을 교체한 반(反)엘리트 집권세력이면서 자신들만 도덕적이라는 신(新)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자기네 판단은 정말 옳은데 신문이 트집 잡고 비판한다는 논리가 전형적 엘리트주의다. 평등과 분배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게임의 룰을 뒤바꾼 그들은 출산부터 교육, 상거래까지 국민 삶의 모든 영역을 지도(指導) 편달하려 든다. 어리석은 백성이 뭘 알겠느냐는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의 부활이다.
이 수구(守舊) 좌파 정권이 진정 평등과 분배를 원했다면,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해 국민 스스로 평등과 분배를 실현하게 했어야 했다. 전국교직원노조와 손잡은 우둔화 교육, 우수 인재의 진학을 가로막는 대입제도로는 엘리트가 나오기 어렵다. 정권에 도전할 민간 엘리트의 싹을 짓밟아 무능한 신엘리트가 영구 집권하겠다는 속셈인가.
중국도 지난달부터 대학 정원 감축에 들어갔다. 대졸 실업자들이 공산당 독재에 반대해 궐기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다. 26일엔 정부 공식 발표가 아닌 내용을 보도하면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성다(昇達)대 학생들이 ‘사기 졸업장’과 취업난에 항의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뉴스 같은 건 앞으로 신문에서 못 볼 판이다.
이번 헌재 결정이 아니었다면, 언론과 교육을 장악해 권력을 유지하는 독재정권의 수법이 대한민국에도 뿌리내릴 뻔했다.
카를 마르크스도 비판 언론 없으면 민주주의가 없다고 했다. 정부가 아무리 신문시장의 경쟁력을 살리고 언론자유를 보호하겠다고 해도, 법이든 보조금이든 배달망이든 정부가 간섭하는 순간 정보 왜곡은 시작된다고 세계은행이 지적했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헌법은 살아 있음이 입증됐다. 감시견 역할을 충실히 하는 신문이 있는 한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에 희망은 있다. 신문에 대한 엄중한 평가는 정부 아닌 독자의 몫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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