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 이사는 임기가 길 뿐 아니라 7명의 이사를 한꺼번에 바꿀 수 없도록 했다. 짝수 연도의 1월말에 한명씩 임기가 끝난다. 금융정책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임기 중에 그만두는 이사의 후임은 당연히 잔여 임기만 채운다. 대통령이 연임해도 이사를 절반 이상 바꾸기는 어렵다.
미국이 부동의 중앙은행 제도를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 과거 은행과 기업의 도산이 빈번한 탓에 극심한 금융불안과 경기침체를 경험한 그들은 안정장치가 필요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경기를 띄우고 싶은 권력자의 유혹도 뿌리쳐야 하지 않았을까. '경제대통령'이라 불렸던 그리스펀 전 의장은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금리인하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통화정책에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실패할 것이 거의 확실한 방법을 시장에 강요할 수는 없다"고 버텨냈다.
이런 미국에 비하면 우리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대통령의 권한에 비해 너무 약골이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7명을 모두 한 대통령이 바꿀 수 있게 되어 있다. 금융통화위원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성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주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 등이 청와대에서 만난 자리에서 '(서민경제 회복은) 내년 하반기에 맞추자. 그때가 대선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이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정치일정에 맞춰 경기를 조절한다는 얘기가 있지만 공개석상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라니 뜻밖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서민경제가 어렵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하지 않는다'던 말은 선거를 의식한 발언이었는지 묻고 싶다. 부동산 세금폭탄을 완화한다는 것도 내년 대선에 맞춰 경기를 살리기 위한 발언이었나.
올 하반기 경제 전망은 매우 어둡다. 소비자기대지수 경기동향지수 기업경기실사지수등 각종 전망치가 일제히 내리막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와는 아랑곳 없이 내년 대선에 맞추어 경기를 조절하려 든다면 왜곡현상만 커질 것이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를 치렀던 2002년을 돌이켜 보자. 당시 연초부터 수출은 부진한데 내수경기는 급격히 상승세를 탔다. 경제전문가들은 경기과열을 경고하는데도 은행들은 가계대출을 늘렸고 경제장관들은 내수를 살려야 한다고 이구동성이었다. 그 결과 전년도에 3.8%였던 성장률이 7%로 치솟았다. 그러나 2003년에는 3.1%로 다시 급감하는 경기의 '냉온탕'을 겪어야 했다.
이번에도 선거에 이기기 위해 이런 식의 경기조절을 되풀이하겠다는 의도를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이런 식의 파행적인 경기조절에 직언으로 반대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대통령이 일정을 제시했으니 장관들은 그에 맞춰 경기를 조절하려고 애쓸 것이다. 장관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립을 외치던 한국은행은 어떤가. 노대통령과 고교 동창인 한국은행 총재와 노대통령 재임중에 임명된 6명의 금융통화위원들이 그린스펀처럼 직언을 할 수 있을지 영 미덥지 않다. 곧 경제팀이 새로 짜여진다고 하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자리만 바꿔 앉은 모양새라 새 경제팀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니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다.
국민들은 이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다. 경기회복을 고대하지만 대선 전후의 인위적인 반짝 경기과열을 반가워 해서는 안된다. 경제를 망쳐도 선거에만 이기고 보자는 계산을 읽어낼 것이다. 국민들이 코드장관을 견제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처럼 '경제대통령'을 따로 뽑아야 할까.
박영균 편집국 부국장 park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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