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2>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 입력 2006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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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양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리기 어려운 것이니 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독숙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본문 중에서》

남의 일기를 몰래 보는 일은 어릴 적이나 커서나 마찬가지로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에 쓰인 한 사람의 일기를 볼 수 있다면 그 흥미는 배가되지 않을까. 1513년부터 1577년까지 살았던 선비 유희춘은 거의 매일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일지’를 쓰듯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미암일기’다. 그런데 국문학자인 정창권 박사는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이 수집한 자료를 보태서 새로운 이야기책을 만들어냈다.

현재 전해지는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칠 즈음인 1567년 10월 충청도 은진의 유배소에서 적은 내용에서 시작한다. 정창권의 책 역시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와서 관직 생활을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책의 첫머리는 1567년 음력 11월 5일 유희춘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인 대공을 불러 세수 준비를 시키고, 아침을 어떻게 먹고, 무엇을 타고 궁궐로 행차하는지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미암일기’에서 유희춘은 이날의 일기에 “날씨가 갬. 아침 강의를 위해 먼동이 트기 전에 의관을 정제하고 궁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고만 썼을 뿐이다.

결국 정창권은 이 책에서 사료에만 매달리는 역사학자와 달리 문학적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모험을 시도한다. 이런 모험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희춘이 1571년 음력 5월 11일 전라감사로 전주에 있을 때, 한양에서 관리 박화숙이 공무로 전주에 온다. 그래서 매월루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박화숙이 유희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미암일기’에 적혀 있다. “나더러 평생에 여색을 가까이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유독 옥경아를 귀여워한다면서 특별히 술잔을 들어 직접 주기도 했다.”

이 대목을 두고 정창권은 ‘기녀 옥경아와의 사랑’이란 제목의 절을 별도로 만들어 8쪽에 걸쳐서 미암과 옥경아의 만남, 그리고 기생과의 잔치 모습을 그려냈다. 사료에 한 줄만 나오는 ‘장금’이나 ‘공길’을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로 변신시킨 일에 비견될 정도다.

더욱이 500년이란 긴 시간의 조선시대를 하나의 시스템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교과서적인 독자들에게 이 책은 또 다른 상식 이상의 정보를 제공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세기 후반 한 중앙 관료가 54세부터 11년 동안 겪은 관직 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 증식, 부부 갈등, 노후 생활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다만 생활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유희춘이 살았던 시대 전후의 사회문화적 맥락과 일상의 삶을 연결시켜 주지 못하는 건 아쉽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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