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4일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 프로에선 개그맨 두 명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럼 배드 가이(bad guy)는 나쁜 녀석이란 뜻이야?” “아니지, 나쁜 녀석은 고이즈미지.” 박수가 터졌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국내의 반일(反日)감정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온 패러디다.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웃나라 지도자를 이렇게 조롱해도 되는 것일까.
9월 퇴임하는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과 중국에선 요즘 말로 손꼽히는 ‘비(非)호감 캐릭터’이지만 일본에선 성공한 지도자다. 10년 장기불황을 전후(戰後) 두 번째로 긴 호황으로 이끌었고, 우정(郵政) 민영화, 공무원 감축과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 무엇보다 미일관계를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지난주 방미(訪美) 때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전용기를 함께 타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 그레이스랜드를 찾는 등 밀월관계를 과시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부시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레슬리가 생전에 즐겨 썼던 선글라스를 끼고 프레슬리의 춤 동작을 흉내 냈다. 마지막 회견은 프레슬리의 노래 제목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달콤하게 사랑해 줘요)’를 인용해 미국에 감사를 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러브 미 텐더’라, 예순 넷의 이혼남이 닭살 돋게 무슨 그런 소리냐고? 천만에.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부주석 시절인 1979년 1월 75세의 나이에 미국을 처음 공식 방문해 이 노래를 불렀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도 70세이던 1996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 노래를 열창했다.
연애할 때조차 그런 달콤한 노래를 불렀을 것 같지 않은 중국, 일본의 지도자들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미국에 구애(求愛)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팝 문화에 물들어서? 자주성이 떨어져서? 역시 국익(國益) 때문일 것이다. 중-일 두 나라도 강대국이지만 미국과의 국력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국가전략 차원에서 미국과 좋게 지냄으로써 실리를 취하려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때론 모욕도 참고, 개인적인 감정도 억제해야 하는 게 국가 지도자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하면서 친(親)부시 행보를 취해 온 것도 국익을 최우선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과도 국력을 견주기엔 부족함이 너무 많은 나라다. 그런데도 세상 물정 모르고 “반미(反美)면 어때” 한다면 정말 대책이 없다.
‘울고 넘는 박달재’와 운동권 가요 ‘상록수’를 애창한다는 노무현 대통령도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러브 미 텐더’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듣기 좋은 노래를 불러야 박수를 받을 수 있다. 9월로 예정된 그의 방미가 주목된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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