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5>우리 역사 최전선

  • 입력 2006년 7월 6일 02시 59분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유길준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중국이라는 외세를 무시할 수 없었듯이, 오늘의 한국인들이 스스로 이룩한 물질적 성공의 이면에 버티고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이 때문에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힘이 곧 정의’인 국제 정치 질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색하는 과정에서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본문 중에서》

독도 문제로 한일 간의 긴장관계가 다시 조성되고 있는 시점에 100년 전의 역사적 상황을 소재로 삼아 현실(fact)과 환상(fiction)의 경계를 해체한 ‘팩션(faction)’으로 재구성하는 영화 ‘한반도’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요즘 신세대는 신인류라 불릴 만큼 세상이 급변하는데 한반도에서는 왜 100년 전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일까? 이 문제를 화두로 삼아 박노자, 허동현 두 교수가 2000년부터 약 3년간 거의 매일 장문의 e메일을 주고받았고, 이 왕복 서신을 책으로 묶은 것이 ‘우리 역사 최전선’이다.

이 책에서 박 교수는 100년 전 잡지나 신문을 펼쳐 보면 한 세기 이전이 아닌 ‘지금 여기’의 문제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고 썼다. 그는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돼 나갈 때 이전의 발전 패턴들이 구조적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100년 전 서구 열강과 청·일 두 나라가 국가 존립을 위협했다면, 이제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미국을 방문한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서 더할 나위 없는 환대를 받고 ‘신세기 미일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이 설정하는 공동의 적은 중국임이 뻔하다.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 끼어 있는 새우 신세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역사의 반복을 낳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이런 구조적 요인으로부터 재발하는 역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박 교수는 유길준의 ‘중립화’ 제안에서 찾았다. 이에 대해 허 교수는 ‘중립화’ 제안의 속내는 자력이 아닌 중국에 기댄 중립이었다는 답장을 썼다. 유길준은 중국이 조약의 주창자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아시아 지역과 관계있는 여러 나라가 회동하는 자리에 우리나라가 참여하여 공동 조약문을 작성하도록 중국에 계속해서 간청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이런 유길준의 제안은 전근대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근대적 형식으로 변형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허 교수는 중국이든 미국이든 외세가 우리 역사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도록 내부 역량을 기르는 것이 100년 전 역사 속에서 미래의 교훈을 찾는 것이라고 썼다.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개인주의적 진보주의자’를 지향하는 박 교수와 ‘건강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허 교수의 논쟁은 그야말로 창과 방패를 방불케 한다.

16강 탈락과 함께 월드컵의 흥분과 기대는 이제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게임을 해야만 하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축구 경기로 21세기 한반도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일본과의 독도 문제라는 우리 역사의 최전선에서 벌여야 하는 싸움에서 박 교수의 창과 허 교수의 방패는 우리가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임에 틀림없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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