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8년, 일본의 침략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영의정 유성룡(1542∼1607)은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안동으로 돌아갔다. 당시 항간에는 조선이 일본군과 합세해 명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이것은 물론 일본의 이간질이었다. 하지만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 군대의 행패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성룡의 사퇴는 외교 현안을 계기로 불거진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훗날 선조임금은 유성룡을 거듭 불렀으나 끝내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 당장의 부귀영화보다 그에게는 역사의 심판이 중요했던 것일까. 그는 저술에 매달렸다. 재임 중 걸핏하면 비난의 화살이 자기에게 쏟아지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명장 이순신을 조정에 추천했건만 그로 인해 처벌을 받은 일, 임금을 모시고 고된 피란길을 떠났다가 관직에서 쫓겨난 것, 게다가 한낱 소문 때문에 파란 많은 관직 생활을 청산하게 된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엔 도체찰사로서 군사업무를 총괄했고, 곧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의 역사가들은 유성룡더러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느냐며, 심문해 올 것만 같았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할 말이 없지 않았다. 미리 전쟁의 낌새를 알아차려 그는 신립과 대비책을 논의했었다. 이순신과 권율을 벼슬길에 불러내 전세를 호전할 계기도 마련했다. 훈련도감의 설치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 앞에 노골적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유성룡은 간파했다. 역사상 많은 지도자들은 거짓에 가득 찬 회고록을 내놓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유성룡은 오랜 숙고 끝에 엄정한 자기비판의 길을 선택했다.
‘징비록’에서 그는 지배층의 무능과 위선, 부패와 무책임을 사실 그대로 드러낸다. 우유부단한 국왕의 모습까지도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린다. 지배층을 겨냥한 백성들의 따가운 질책도 숨기지 않는다. 굶주림 끝에 식구를 잡아먹은 민중의 참상 역시 담담한 필체로 적어 놓는다. 서술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유성룡은 감정의 절제를 전략적으로 선택한다. ‘징비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일본군의 만행을 직접적으로 규탄하는 격앙된 음성을 찾기 어렵다. 유성룡의 붓끝은 무엇보다도 내부의 적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지배층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우여곡절이 많은 한국 현대사다. 유성룡의 선택을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은 또 다른 징비록들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자기변명 같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 역사의 진실이 궁금한 것이다.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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