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 특집의 시절이 돌아왔다. 소복을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처녀귀신이 텔레비전을 곧 장악하리라.
여기 또 하나의 처녀귀신이 있다. 인상 쓰지 마시길. 김영하라는 이야기꾼이 살려 낸 아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귀신과는 사뭇 다른 척한다. ‘아랑은 왜’는 그 첫 구절부터 심상치 않게 시작한다. “아랑은 나비가 되었다고 한다.”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순간 우리는 작가가 쳐 놓은 이야기의 함정에 걸려든다. 얼개는 이렇다. 아랑을 흠모한 아랫것이 있었다. 신분의 차이를 이겨내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기에, 유모를 매수해 아랑을 범하려 했다. 그러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치자 그녀를 죽였다. 고을 수령이었던 아비는 딸이 행방불명되자 관직을 버리고 사라진다. 그런데 괴이한 일이 벌어진다. 새로 부임한 수령마다 첫날 밤에 죽어 버린다. 아랑의 저주가 시작된 것일까.
다음 이야기는 지레짐작할 수 있다.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조정에서는 수령을 공개모집한다. 담 큰 사람이 귀신으로 나타난 아랑의 하소연을 듣고 한을 풀어 주니 마침내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면 나비는 무슨 이야기지 하고 궁금해할 법한데, 흰나비가 된 아랑이 범인의 상투 끝에 앉았더라는 것이다. 실망하지 마시길. 얼개가 그렇다는 것이지, 소설 자체가 이런 식으로 쓰였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는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마련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근대적 의미의 탐정과 법의학자를 투입한다. 김억균과 김령이 바로 그들이다. 납량 특집극은 이들로 인해 비로소 ‘지식’소설의 반열에 오른다.
그리하여 진실은 밝혀졌는가. 밝혀졌다. 아랑의 죽음에 얽힌 음모가 샅샅이 드러났고, 진짜 범인을 색출해 엄하게 다스렸다. 예부터 유명한 제방인 수산제(守山堤)와 치정에 얽힌 살인이 문제의 핵심이었다(여기까지는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아랑이 나비가 됐다는 말은 무엇인가, 담 큰 수령이 만났다는 아랑은 또 무엇인가. 아랑을 사이에 놓고 벌어진 욕망의 실타래는 그 끝이 안 보인다. 꼬여서가 아니라 이야기라는 안개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여기서부터 ‘역사’소설이 된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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