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깨치고 제도 교육을 받으면서 이순신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위인전 속에, 초등학교 운동장의 동상으로, 단체 관람 영화로, 국사시간 시험문제로, 수학여행 목적지로 이순신을 대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이순신은 항상 내 곁에 없었다. 선생님들이 성웅(聖雄) 이순신을 존경하라고 했든, 권력자가 존경해서 띄운 사람일 뿐이라고 은근히 반감을 가졌든 내 주변에 이순신은 많았지만 내 마음속의 이순신은 없었다.
‘이순신의 두 얼굴’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영웅 이순신을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접하면서 익숙하게 느껴 왔지만, 진면목을 몰랐던 사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할까.
이 책은 우국충정이나 호국정신 같은 상투적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목청을 높이지 않는다. 그 대신 철저하게 사료를 읽고, 사료의 의미를 생각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살아 있는 디테일이란 덕목을 확보했다.
‘일본 함선이 판자가 얇고 쇠못을 많이 쓰는 반면, 조선 판옥선은 판자가 두껍고 나무못을 쓴다. 일본 배는 빠르지만 약하여 깨어지기 쉽고, 조선 배는 느리지만 튼튼하다.’
조총은 없었지만 화포에서는 앞섰던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칼싸움에 능한 일본군의 접근전 시도를 끝까지 뿌리치고, 튼튼한 함선과 강한 화포를 이용하여 철저한 돌격 전법과 포격전으로 23전 23승 불패 신화를 이룬다.
저자는 “이순신은 절대로 지는 전투는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순신은 자만에 빠지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에 임했다. 해전에서 그는 ‘준비’된 상태에서 ‘의도’한 대로 적을 맞았다.
이순신은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했고, 유리한 시점과 지형을 택하였으며 무엇보다 자만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전략가이고 경영자였다.
당시의 무능한 지배층을 바라보는 저자의 눈초리는 매섭다. 지배 정권의 진정한 권위는 그 의무를 다할 때 있는 것인데 전란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지배세력은 공신 임명에서 또 한번의 희극을 연출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무인을 기리는 선무공신(宣武功臣) 훈공은 18명에게만 내리고, 선조의 피란길에 동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무려 86명이나 임명한 것이다. 호성공신 중 내시가 24명이니, 이순신과 함께 싸운 장수들보다 도망치는 비겁한 왕의 말고삐를 잡은 내시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한 것이다.
‘칼의 노래’가 인간 이순신의 내면 탐구라면, 이 책은 영웅 이순신의 역량과 리더십에 대한 외면 분석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저자가 이뤄 낸 아마추어의 성취라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김경준 딜로이트 상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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