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한 스승께서는 “고전(古典)이란 모름지기 재독(再讀)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어떤 책이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시대가 바뀌어도 그 시대에 맞는 깨달음을 책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책 속의 과거가 씨줄과 날줄이 교차되듯 엮이면서 옛날에 그 책을 읽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격치(格致)의 경지를 보여 주는 책, 그러한 책이 바로 고전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조선후기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시경 빈풍편(빈風篇)에 나오는 시 ‘올빼미(치梟)’를 둘러싼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당시 정조는 육경(六經)과 같은 고문에 나오는 주나라를 전범으로 삼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 하였고, 이는 사서(四書)를 정통으로 신봉하는 노론 사대부들의 붕당정치와 이념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영조에게 종용했던 노론 일당의 명부를 기록해 놓았다는 금등지사의 존재는 비록 허구적인 상상이기는 하지만 남인과 노론의 정치적 갈등의 근원으로 부각되면서 이 작품의 소설적 긴장을 더해 준다.
이 작품이 1990년대 베스트셀러로 부각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같은 추리 소설의 모티프를 원용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능란한 플롯을 선보이고 긴박하게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 점은 이 작품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영원한 제국’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정쟁을 둘러싼 당대 유학자들의 발언을 통해 드러나는 정치 철학의 현재적인 소급이라고 할 수 있다.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에 관한 논쟁이 사서와 육경의 정통성 문제와 문체반정을 거쳐 홍제유신의 현재적 해석에까지 이르면 가빴던 숨을 잠시 골라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왜 저자는 굳이 액자소설의 시점을 도입하여 ‘취성록’이라는 책을 발견한 국문학 연구자의 이야기를 보자기로 삼아 속을 감쌌는지 말이다. 절대왕정이 민주주의로 가는 도정 중 불가피한 과도기였다는 작품 속 화자의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작품의 관찰자로 등장하는 이인몽의 쓸쓸한 말로는 영남 남인들이 걸어야 했던 정당성과 명분의 결과가 너무도 덧없다는 사실과 겹쳐지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한 남인 선비 혹은 정조가 꿈꾸었던 주나라에 대한 동경은 이상주의적인 국가에 대한 낭만을 부르지만, 고대 중국과 조선후기, 그리고 현대 한국정치의 현실적인 시간적 격차를 고려할 때 낭만은 환멸을 동시에 불러온다.
이정엽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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