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논의 과정에서 야당이 6월 민주항쟁의 무드를 타고 개정 헌법에 국민 저항권(抵抗權)을 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저항권은 국가 권력의 불법적인 행사에 대해 국민이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저항권 도입에 반대했다. 그러자 야당이 독일의 헌법소원제도를 들고 나왔다. 저항권보다는 헌법소원이 온건한 인상을 주었다. 여야 타협으로 헌법소원 제도를 도입하면서 사건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유명무실한 헌법위원회를 없애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단임제와 주요 공직선거 시기의 불일치 같은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지만 헌법재판소 제도 도입은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 주 재검표 소동이 벌어졌을 때 연방대법원은 5 대 4로 재검표 중단 결정을 내렸다. 공화당 대통령들이 임명한 대법관의 수가 우세한 연방대법원은 주민의 투표의사를 최종 단계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견해를 누르고 조지 W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앨 고어 후보와 민주당도 승복했고 정치사회적 혼란도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소추됐을 때 탄핵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금은 탄핵소추의 주역인 조순형 씨가 국회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여론이 바뀌었지만) 헌법재판소가 그때 다수 여론과 배치되는 탄핵 결정을 내렸더라면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흔쾌히 승복했을 것 같지 않다. 몇 달 뒤 헌재에서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이 나오자 일부 여당 의원이 헌재의 존재를 부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일천(日淺)한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신뢰를 받으며 헌법적 가치에 충실한 판례를 축적해 나가야만 미국 연방대법원과 같은 권위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4대 헌법재판소장 후보로 전효숙 주선회 이강국 씨가 거론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법시험 동기생인 전 헌재 재판관 쪽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민주당 쪽에서 ‘코드’ 헌재소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국회 임명동의가 변수로 남아 있다.
전 재판관은 판결 경향이 임명 초기와 다르게 바뀌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대통령 탄핵소추나 수도 이전 같은 주요 사건에서 정부에 유리한 ‘각하’ 의견을 냈지만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관련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는 합헌 의견을 냈다. 신문법 헌법소원에서는 ‘공안검사’ 출신의 주선회 재판관보다 위헌 결정에 적극적이었다.
여성 국무총리가 탄생한 한국에서 여성 헌재 소장이 나오는 것도 의미가 크다. 그러나 전 재판관이 이 시점에서 헌재 소장의 격(格)에 맞는 인물인지는 따져볼 여지가 있다. 아리랑TV 부사장도 ‘급(級)’이 안 맞는 사람을 밀어붙이다 난리가 났는데 하물며 헌재 소장은 최상급의 자리가 아닌가.
헌재 소장은 평의(評議)의 주재자이며 헌재를 대표한다. 기능이나 위상에 비추어 헌재 소장은 대법원장과 ‘급’이 비슷해야 한다. 2대 김용준 소장과 3대 윤영철 소장도 대법관 출신으로 임명됐다. 그런데 전 재판관은 이용훈 대법원장보다 시험 기수로 18기 아래다. 사법시험 동기생이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대법원장이나 헌재 소장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자리와 다르다.
2012년 5대 헌재소장을 인선할 때는 김영란 전수안 대법관과 전효숙 재판관이 거론되더라도 법조계에서 경륜 부족이라는 말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가 길지 않은 헌재의 격과 권위를 생각한다면 여성 헌재 소장이 나오기는 아직 이르다고 보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
황호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황호택 논설위원이 신동아에서 만난 '생각의 리더 10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졌습니다.
가수 조용필, 탤런트 최진실, 대법원장 이용훈, 연극인 윤석화, 법무부 장관 천정배, 만화가 허영만, 한승헌 변호사, 작가 김주영, 신용하 백범학술원 원장,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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