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국회 운영위원회로부터 의뢰받은 국민의식 조사가 발표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4.6%가 경제 발전을 꼽았다. 나는 이 조사결과가 갖는 함의가 매우 크다고 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세계화 시대가 본격화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실로 지대하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 국내 주식시장에서의 절반에 가까운 외국자본 비중, 빈부 격차 심화와 사회적 양극화의 강화, 영어 열풍과 조기 유학 러시, 그리고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의 한가운데는 세계화의 충격이 놓여 있다고 봐야 한다.
데이비드 헬드 영국 런던정경대(LSE) 정치학 석좌교수 등이 쓴 ‘전지구적 변환’은 세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표준적인 논의를 제공한다. 여기서 표준적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가치판단보다는 사실판단을 우선시한다. 저자들은 경제적 세계화로부터 시작해 정치 군사 이주 문화 환경 등 세계화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상세한 토론을 펼친다. 세계화에 대한 이념적 재단이 앞서는 현실을 지켜볼 때 이는 분명 미덕이다.
둘째, 이 책은 세계화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나 반대를 유보하고 그것이 주는 충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세계화의 본질과 그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상반된 두 시각이 맞서고 있다. 우파는 세계화가 가져오는 경쟁력 강화와 성장의 효과에 주목하는 반면, 좌파는 세계화가 낳은 사회적 양극화 및 불평등 강화를 강조한다. 이 책은 중도적 관점에서 이 두 시각을 모두 아우르고자 한다.
바람직한 세계화에 대해 이 책이 제시하는 정치적 기획은 ‘세계주의’다. 세계주의는 전 세계 시민들이 여러 정치공동체에 접근하고 가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구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이것은 비정부기구(NGO)를 포함한 다양한 비국가 행위자들이 초국가적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고삐 풀린 세계 자본주의를 통제하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세계화 시대를 되돌릴 수 없는 한 개방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개방에 찬성이냐 반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개방을 주체적으로 성취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바람직한 개방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세계화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심층적인 이해가 요청된다. 이 책은 그 출발점을 제공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