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례는 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북핵 문제와 반미 시위로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웠을 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은 자존심의 문제지만 북핵 문제는 생존의 문제”라며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국민이 기억하고 있는 노 대통령의 발언 중 가장 분별 있는 말이었다. 그러던 그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속마음이 나타난 건지, 요즘은 생존의 문제인 안보를 뒤로 물리면서까지 자존심 때문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정권이 내세운 환수의 주 이유가 국가의 자주성과 민족의 자존심이지만 국민은 있는 줄조차 몰랐던 전시작전권 때문에 자존심을 상한 적이 없다. 미군이 우리 내정에 간섭해 주권을 침해한 일도 없다. 오히려 북한이 ‘선군정치로 (남한을) 지켜 주니까 쌀과 돈을 보내라’고 무례하게 굴어도 너그럽게 대하자던 바로 그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서만 ‘자주’를 내세우니 어리둥절해질 뿐이다. 사실 노 대통령은 역대 누구보다도 자주를 갈망해 온 지도자다. 그는 한반도에서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자주를 가장 강하게 주창한 세 손가락 안의 국가원수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세 사람은 집권 중 경제를 악화시켜 백성들을 더욱 배고프고 고달프게 만든 공통점이 있다.
노 대통령은 ‘자주와 자존심’만으로는 부족했던지 광복절 축사에서는 환수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절차상 위헌적 요소’를 내세웠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야말로 염려 안 해도 좋은 일이다. 본질이 아니라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근본을 바꿔야 할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법 집행이나 외교에는 ‘이롭거나 혹은 큰 문제가 안 될 경우 은근히, 또는 호의적으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뜻의 salutary neglect 혹은 benign neglect라는 말이 있다. 전시작전권에 관한 한 지난 수십 년간 과거 정권들은 현명하게 그렇게 해 왔고,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역대 국방장관들과 예비역 장성, 이 분야의 학자 등 많은 군사 전문가는 안보가 취약해진다는 이유로 전시작전권 환수에 반대하지만 좌파 인사들은 우리 군의 국방력이 개선돼 안보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환수를 해야 할 절박한 사유는 못된다. 핵보유국인 북한보다 우리의 국방력이 앞선다는 주장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만 핵이나 미사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남한 내부의 상황이다. 공공연히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음험한 지식인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친북반미에 혈기를 낭비하고 있는 철부지 학생들, 그리고 이들을 감싸고 있는 수상한 정치권, 이들이 서둘러 전시작전권을 확보하려는 자체가 불안을 예감케 하는 일이다.
현 정권이 망가뜨린 경제는 다음 정권이 회복시킬 수도 있다. 도박으로 난장판 된 사회도 언젠가는 바로잡힐 수 있다. 적대와 갈등으로 오염된 국민정서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안보가 무너지면 나라의 운명은 그날로 끝장이다. 노 대통령은 ‘바다이야기’가 터지고 난 후 ‘도둑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전시작전권에 관한 한 주인집 일꾼들보다 더 똑똑하고 충성심 높은 ‘개’들이 ‘환수에 신중하라’고 사방에서 애타게 짖는데 주인은 이번에도 귀를 틀어막고 있다.
대한민국이 지켜갈 이념이 시장경제 체제와 자유민주주의라면 그에 반하는 좌파 성향 인사들은 이 땅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져 갈 이교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지금 운 좋게 득세해 나라살림을 맡고 있지만 우리 후손의 운명까지 그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과제는 국민과 코드가 맞는 정권이 결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전시작전권이 바로 그런 사안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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