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고도의 산업화를 이룩해서 일찍이 꿈꿔 보지 못했던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와 함께 정치의 민주화도 성취해서 과거에 누려 보지 못했던 자유와 인권을 누리며 산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그늘에선 이 시대 이 사회에는 지난날 1000년을 넘는 오랜 동안 간직해 온 중요한 덕목이 스러져 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만의 덕목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덕목이요,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선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근검과 절약, 곧 ‘아낌’의 덕목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아낌의 덕목은 비단 빈곤이 일상화됐던 ‘과거’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온난화로 인류의 생태환경이 갈수록 심각한 파국에 빠져 드는 ‘미래’를 위해서도 다시 생존을 위한 절체절명의 덕목이 되고 있다(이달 중순 개봉될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기록 영화 ‘불편한 진실’은 이를 설득력 있게 증언해 주고 있다).
아낀다는 것은 내키는 대로의 욕망을 삼가는 것, 근신한다는 것이다. 아낌의 덕목이 사라진 사회란 곧 삼가야 함을 내팽개친 사회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그처럼 절제와 근신의 나사가 풀어졌거나 아예 빠져 버린 뭇 현상을 보고 있다. 앞으로 이 난에서는 그러한 사례들을 오다가다 들춰 볼까 한다. 오늘은 그 첫 대목으로 자성(自省)의 의미에서 먼저 내게 가까운 ‘말’의 세계, 곧 언론의 문제부터 다뤄볼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말을 아끼지 않고 말을 삼가지 않는 언론 자유가 넘쳐서 흐르는 희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대통령부터 누리꾼까지 못 하는 말이 없고 안 하는 말이 없다.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말은 함부로 내뱉는 것이 아니라 삼가야 한다는 신언(愼言)의 어훈(語訓)이 지배하고 있던 바로 우리 사회에서.
말 잘하는 것을 서양에선 덕(virtue)으로 간주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걸 부덕(vice)으로 폄훼했다. 말이 좋으면 어질지 못하며 군자는 말이 서툴기를 바랐다. 율곡(栗谷)의 글 ‘학교모범’에는 “유행(儒行)을 닦으려면 모름지기 언어를 삼가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의 ‘격몽요결(擊蒙要訣)’에는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고 노름으로 날을 보내는 자는 다 부모를 잊은 자”라 타이르고도 있다. 막말을 서로 하며 온통 도박에 빠져 버린 오늘의 한국사회가 위아래를 막론하고 부모를 잊은 ‘후레자식들의 사회’가 됐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될까.
언론의 여러 매체도 아끼고 삼가는 덕목은 내팽개쳐 버린 지 오래다. 날마다 50∼60면씩 찍어 내는 일간지―우리보다 경제 규모가 훨씬 큰 일본의 거의 두 배나 되는 우리 신문의 면수는 독자가 소화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신문을 안 보는 것은 볼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도망친다고 보아 잘못일까. 토요일은 신문이 얇아서 좋고 일요일은 아예 신문이 안 나와 더욱 좋다고 하는 독자도 있다.
나는 우리나라 월간 잡지는 거의 안 본다. 볼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이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나는 지구상에 매달 600쪽이 넘는 잡지를 내놓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월간지의 끝을 모르는 증면도 결국은 절제의 덕목이 결핍된 때문이요, 절제의 결핍이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선택’을 포기하는 짓이다. “무절제한 행위는 선택이 아니라 욕망에 바탕하고 절제된 행위는 욕망이 아니라 선택에 바탕을 둔다.”
절제의 나사가 빠져 버린 ‘한국의 세계 제1’은 또 있다. 저녁마다 ‘황금 시간대’에 방송되는 ‘TV 뉴스’―일본이나 유럽에선 15분, 25분으로 끝내도 우리 TV에선 거의 묵살하는 국제관계 보도도 족히 해주는 데 반해서 우리의 TV 뉴스는 장장 한 시간을 끄는데도 그것만 봐선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없다. 심 봉사 등쳐먹은 뺑덕 어미처럼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입 잠시 안 놀리고는 못 견뎌’ TV는 한 시간 내내 입을 놀리고 있는데도….
울산대 석좌교수·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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