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베테랑의 수난

  • 입력 2006년 9월 18일 02시 56분


1918년 11월 11일 새벽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미국은 뒤늦게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했지만 이 승전일을 중요한 국경일의 하나인 ‘베테랑 데이(재향군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미국 재향군인회는 정치적 중립기구이지만 군인가족의 복지는 물론 국방정책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정책을 발표할 때는 재향군인회에서 연설한다. 선진국일수록 베테랑의 존재감은 무겁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는 올해 예산에서 안보활동비를 삭감당했다. 향군 감독기관인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국회에서 여당 의원들에게서 “향군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등 ‘반(反)정부 활동’에 앞장서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고 취한 조치다. 보훈처는 이번엔 향군 사업 전반에 대한 수술과 예산삭감을 시사하고 나섰다. 전시(戰時)작전통제권 단독행사에 반대하는 향군을 ‘응징’하려는 것이다.

▷선진화국민회의 등 보수성향 시민단체들이 12일 전시작전권 단독행사 반대 50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낸 성명서에 ‘단독행사 추진이 이뤄지더라도 내년에 재협상을 공약하는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하겠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향군 측은 즉각 이것이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반박자료를 냈다. 그런데도 박유철 보훈처장은 15일 “(향군의 서명식 참가를) 정치활동으로 생각한다”며 “어떻게 향군을 제재하느냐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작전권 단독행사가 초래할 안보불안은 많은 전문가와 전직 국방장관, 전직 외교관, 전직 경찰총수 등이 한목소리로 걱정하고 있다. 향군은 누구보다 먼저 이를 걱정할 집단이다. 이런 향군을 지원하는 게 임무인 보훈처가 ‘향군의 정치성’ 운운하며 예산삭감 협박을 하니 보훈처야말로 ‘정치코드’에 물든 조직 아닌가. 그런데도 당시 성명서를 낭독했던 박세환 향군 부회장이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겠다며 어제 사퇴했다. 안보가 코드에 휘둘리는 시대를 향군도 힘겨워하는 듯하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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