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한-러관계 전략이 없다

  • 입력 2006년 10월 19일 02시 55분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러시아 논객들은 곰 사냥 얘기를 꺼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곰은 울창한 타이가 숲 속에 있을 때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냥개들을 풀어 놓는 것이다. 곰이 사냥개 때문에 퇴로가 막히면 포수가 총 쏘기에 알맞은 거리로 몰린다는 것이다.

사냥개에게 몰린 곰은 러시아의 안보 상황을 빗대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는 서남쪽의 그루지야와 이란, 서쪽의 폴란드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북한 핵실험 사태를 맞았다.

모스크바의 TV들은 당시 그루지야에서 추방된 러시아군 장교 3명의 귀환과 러시아에 거주하던 그루지야인들의 추방, 양국 외교부의 설전, 시민들 반응을 매일 보도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사사건건 서쪽 국가들과 충돌하는 사이 동쪽 변방에 ‘위험한 이웃’이 하나 더 생겼다. 곰 이야기에 나온 전략적 함정이 정곡을 찌른 셈이다.

요즘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볼 때 한국 정부와 기업인들이 이 이야기를 웃어넘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북한 핵실험 당일 러시아와 중국은 평양으로부터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사전 통보를 받았다. 중국은 이 정보를 한국에 알려 줬지만 한국과 2조 원 이상의 무기 거래를 한 러시아는 모르는 체했다.

한국이 정보를 공유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인지, 러시아가 정보를 주기 싫었는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양국의 안보 협력 관계가 1990년 수교 이래 16년째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경제 통상 협력 분야에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2003년 9월 김진표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모스크바를 방문해 러시아가 한국에서 빌린 채무 중 6억6000만 달러를 깎아 줬다. 그 대가로 러시아 정부는 한국 기업에 특혜를 주는 나홋카 경제특구법안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이 법안은 사실상 백지가 됐다. 외국기업의 특혜를 대폭 줄이는 대체 법안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나 가스공사가 러시아 사업권 입찰에 실패할 때마다 한국 공무원들은 “돈이 부족해서 탈락했다”고 말한다. 러시아 경제인들은 “대(對)러시아 채권이 13억 달러 이상 남아 있는 한국이 자금 부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전략 부재를 지적한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러시아에서 갖가지 사업을 벌여 놓았다. 한국에서 만든 김치가 모스크바에서 팔리고 러시아 인공위성 기술을 한국에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가 힘을 쏟고 있는 에너지 자원 개발 및 도입 사업은 중국과 서방국가에 계속 밀리고 있다. 12일 서울에서 열린 한-러 경제과학기술 공동위원회에서도 한국 정부는 러시아 에너지 추가 개발을 희망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얻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러 관계에서 한국이 사냥개에 몰린 곰처럼 갈피를 못 잡고 전략적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냉철하게 이모저모를 살펴볼 때가 왔다.

일본과 중국의 동시베리아 송유관 경쟁은 이 지역에서 국가 전략의 중요성을 한마디로 보여 준다. 중국은 3월 정부와 민간이 합동으로 러시아제 무기 구입을 약속하며 당초 일본으로 향하려던 동시베리아 송유관 노선을 기어코 중국으로 돌려놓았다. 일본은 민간기업 위주로 유전 개발에 나섰다가 중국에 졌다. 국가와 민간기업의 통합된 전략과 실행 계획의 효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정부 따로 민간 따로, 또 부처별 분야별로 쪼개진 계획과 사업으로 러시아를 상대하다가 매번 눈앞에서 중요한 열매를 놓치고 마는 전략 부재를 이젠 고쳤으면 한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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