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유누스 모델

  • 입력 2006년 10월 20일 03시 04분


“그해 겨울은 막막했다. 퀭한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앉았고, 귀에서는 북소리 같은 이명이 요란했다. 10여 년간 면벽하고 그림만 그려 온, 서른을 훌쩍 넘은 싱글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아동복 가게를 열었으나 자본과 경험 부족으로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와 인연이 닿았다.” 사회연대은행 홈페이지에 뜬 이 수기(手記)처럼 국내에도 마이크로크레디트의 도움으로 창업한 가게가 벌써 156호점에 이른다.

▷올해 노벨 평화상 및 서울평화상 수상자인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가 도입한 마이크로크레디트는 담보나 보증 부족으로 은행 문턱을 넘을 수 없는 빈민층에 무보증으로 소액의 창업자금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내가 배운 경제학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못사는 조국에 절망하던 엘리트 경제학자는 1974년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 주민 42명에게 호주머니에 있던 27달러를 주며 “돈을 벌어 갚아라”고 했다.

▷‘오병이어(五餠二魚·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주민들은 돈이 생기자 빌린 돈부터 갚으러 왔다. 이들은 나아가 은행의 예금주가 돼 주었다. 그라민은행은 2185개의 지점을 가진 거대 은행으로 성장하며 세계 50여 개국에 마이크로크레디트 모델을 전파했다. 최근엔 소액금융사업의 가능성에 착안한 씨티은행 등 은행업계와 알리안츠, AIG 등 보험업계도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유누스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유누스는 뿌리부터 시장주의자였다. 그래서 그가 빈민구제를 위해 선택한 방식은 사회주의혁명도, 일방적 자선행위도 아닌 소액 신용대출이었다. 선심(善心)이 빈곤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자선은 의타적 거지를 양산한다”고 강조했다. ‘소득 1만 달러의 덫’에 걸려 있으면서도 퍼 주기 식 복지에 매달려 경제성장의 걸림돌을 자초하는 우리 정부가 유누스 박사한테서 배워야 할 핵심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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