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서울역 미술관

  • 입력 2006년 10월 25일 03시 01분


몇 개의 희망과/몇 개의 절망을 품에 안고/오늘도 우리는 떠나고 있다(중략)//날마다 울리는 기적소리처럼/서러운 그림자 길게 남긴 채/사람들은 제각기 어디론가 떠나가고/말없이 불켜지는 서울의 하늘 아래/오늘도 눈이 내린다//눈은 쌓여서/아직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꿈속까지 젖어들고/누군가 돌아올 사람들을 기다리며/서울역 대합실은 한밤 내 깨어 있다(이정화의 ‘서울역에서’ 중). 한국인에게 서울역은 그야말로 관문으로 때론 방황과 이별, 때론 만남과 새 출발의 상징이다.

▷1925년 준공된 서울역이 식민지가 돼 버린 옛 왕도(王都)에 안긴 충격은 엄청났다. 조선총독부 소속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라란데와 도쿄대 건축학과 쓰카모토 야스시 교수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을 본떠 설계한 서울역은 비잔틴 양식의 돔과 벽돌 소재의 르네상스적 외관으로 단숨에 경성(京城)의 명물이 됐다. 2004년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첨단 신역사에 자리를 내준 이 역의 소유권을 문화재청이 이전받는 것을 계기로 근대 미술관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역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대표적 사례는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다. 최고재판소가 있었던 이곳은 1871년 파리코뮌 때 불타 버린 뒤 1900년 기차역으로 탄생했다. 그러다 파리 도심의 환경 변화와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이용자가 줄어들자 퐁피두 대통령이 미술관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1986년 개장한 오르세 미술관은 철도역 시절의 커다란 시계와 자연채광을 그대로 살림으로써 ‘빛의 예술’인 인상파 작품 전시에 안성맞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물원 옆 미술관’인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접근이 편하지 않다. 사적 284호인 서울역 건물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런 점이 서울역 미술관 건립 구상의 근거들이다. 서울 강북 도심에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어 줄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사회적 합의절차를 남겨 놓고 있지만 서울 한복판의 근대적 공간을 가득 채운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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