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하류인생 만들기

  • 입력 2006년 11월 9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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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마다 집권당이 참패하고 성난 민성이 청와대 홈페이지를 도배할 정도면 국가경영자는 일단멈춤을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계속 마이웨이다. 시장(市場)과 맞서 이기는 정부 없다는 걸 국민은 진작 알아챘는데도 정권의 충신들은 “삼성은 국민의 기업!” “사교육의 책무성 강화!”라며 목청을 높인다. 동반 전사(戰死)도 감수할 기세다.

정치 독재 뺨치는 ‘경제 파시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렀던 사람들은 정치적 탄압만 독재인 줄 안다. 나치즘 파시즘부터 공산주의와 이슬람근본주의까지, 그 이름도 다양한 전체주의는 국가가 국민의 몸과 마음을 통제한다는 것이 본질이다. 정치적 자유만 제한하는 독재는 차라리 단순해 보일 정도다.

“국가가 개인의 활동, 특히 경제를 규제하고 언론과 교육을 통제해 생각까지 지배하려는 것이 전체주의”라는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시플리의 정의가 맞는다면 한국의 현 정권은 이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위원회와 노사정(勞使政) 파트너십, ‘회전문 인사’를 통한 정부의 경제 개입이 경제 파시즘의 특징”이라는 경제학자 토머스 디로렌조의 논문은 괜히 봤다 싶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 정권만 옳다는 강철 신념이 없고서야 끊임없는 정부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통제와 언론탄압의 강도를 높여갈 리 없다.

그래도 나치즘은 당시 독일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1932∼34년 공공지출의 10∼35%를 일자리 창출에 쏟아 부어 완전 고용을 이뤄 냈다. 노동운동과 가격 인상을 금지하면서 자급자족 경제를 택한 결과다. 오늘의 한국정부는 지지율 10%대에 노사협력 114위, 정부 지출 부문 73위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공공지출을 늘려 분배와 성장을 다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그리만 되면 대한민국 만세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굴욕에도 굴하지 않는 ‘팽창 정부’의 자신감이 뉴딜정책의 ‘미신’에서 나오지 않았기 바란다. 1930년대 대공황과 실업문제를 끝장낸 건 뉴딜정책이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는 연구결과가 수도 없이 나왔다. 뉴딜의 발상자로 알려진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돈 풀기 정책’을 제안한 것도 이미 적자재정이 진행 중이던 1933년 12월 31일 뉴욕타임스를 통해서였다.

디로렌조는 ‘뉴딜 파시즘’을 비롯한 경제 파시즘이 지금도 산업정책, 사회적 책임, 경제 민주화라는 현대적 이름으로 출몰한다고 했다. 4000년 전 함무라비법전에도 등장했던 ‘가격 안정화’는 물량 부족, 품질 악화, 암시장 성행, 심지어 프랑스혁명 때는 로베스피에르라는 지도자의 죽음까지 초래했다. 그런 가격 통제가 대한민국 부동산시장에 또 등장했다.

시장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착한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는 건 정부를 제외한 모든 부문이 사악해서가 아니다. 소수의 집권 엘리트가 수많은 개개인의 동기(動機)와 수천 년의 생명력을 지닌 시장을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유토피아를 이승에 세우려는 종교 행위나 다름없다. 일본에선 일할 뜻도 능력도 부족한 사람들이 ‘하류사회’를 이룬다지만 우리나라에선 정부만 믿고 있다 집 못 사고, 일자리 못 구한 사람들로 하류사회가 생길까 겁난다.

자유 보장하듯 시장원리 존중을

자본주의의 핵심은 ‘경제와 국가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자유가 민주주의라면 경제의 자유는 시장경제다. 인간의 자유가 정권의 통제보다 힘세다는 게 20세기 말 소련 붕괴로 이미 증명됐다. 며칠 전 방한했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현재로선 고칠 필요가 없는 시스템”이라고 했지만 시장의 부정적 외부 조건을 바로잡고 교육, 인프라 확충,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정부 활동은 물론 환영이다.

다음 선거까지 정부가 시장과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하듯 살 수는 없다. 소련 공산당도 살아남기 위해 1990년 2월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새 강령을 발표했었다. 대통령만 마음을 바꾼다면 평화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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