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나는 이북 사람들은 뿔 달린 귀신이라는 소리를 믿지 않았다. 큰고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내게 큰고모는 당신 자체가 ‘이북’이었고 ‘동족’이었다. 언제나 푸근한 미소로 반겨 주고, 군것질이 궁했던 시절에 배추꼬리 하나라도 챙겨 주던 큰고모의 어디에서 뿔 달린 귀신을 찾는단 말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고 했다. 북이 핵을 폐기하지 않는 한 포용정책을 접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른바 ‘평화론자’들은 전쟁을 선동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졸지에 ‘전쟁론자’가 돼 버린 꼴이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데 문득 떠오른 것이 가르마가 희끗하던 큰고모의 둥그런 얼굴이었다.
‘평화론자’들의 선두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평화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강조한다. 10월 9일 북이 핵실험을 공표했을 때 그는 “포용정책을 포기하도록 객관적 상황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달이 안 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 사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월 31일 북이 6자회담 테이블로 돌아오겠다고 했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1월 7일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패배했다. 그러나 한국은 6자회담 재개(再開) 과정에서조차 철저히 배제됐다. 미국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했다지만 대북(對北)정책의 근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6자회담이 다시 열린다 해도 북이 체제 보위(保衛) 수단인 핵을 선선히 포기할 리는 없다. 결국 북의 핵실험 상황에는 아직 ‘아무 일’도 없는 셈이다.
부시의 패배에 환호한 것은 평양정권만이 아니다. 노 정부도 반색한 듯싶다.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 제출할 이행계획에는 알맹이가 없고, 미국이 요구해 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의 정식 참여도 거부했다. ‘평화적 전략’으로 북핵 위기를 풀어 가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핵은 민족의 특수 관계를 넘어서는 국제 문제다. 따라서 핵 위기를 대북 평화번영정책이란 민족 우위(優位)의 ‘평화적 전략’만으로 풀 수는 없다. 더구나 민족 공조를 앞세우는 평양정권도 핵에 관한 한 ‘통미봉남(通美封南)’ 즉, 이는 조미(朝美) 간의 문제이니 남한은 상관 말라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니 ‘평화적 전략’이라고 해 봐야 딱히 이거다 하고 내놓을 것도 없다.
그런 한계를 외면하고 쌀 주고, 비료 주고, 달러 주면 변하겠지 하고 8년 넘게 끌어 온 것이 햇볕과 포용정책이다. 비록 애초 의도가 좋았다 해도 목표를 이루지 못한 정책은 실패한 것이고, 실패했으면 버리거나 바꾸는 게 당연한 일이다. 실효성을 잃은 정책에 매달려서는 오히려 평양정권의 오판(誤判)만 도울 뿐이다.
그들은 무엇을 믿나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는 남북 민족의 생존을 위해 물러설 수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되는 원칙이 돼야 한다. 여기에 무슨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전쟁을 선동한다고 해서야 그런 ‘평화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평화인가. 그들은 정말 북을 계속 끌어안으면 ‘우리끼리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김정일의 핵’은 결코 남한을 겨냥하지 않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일까.
다시 큰고모를 떠올린다.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다 간 당신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라는 말만으로 평화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핵을 쥔 평양과의 평화는 거짓 평화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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