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다녀온 싱가포르에서 나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우리와 대비되는 여러 상황을 경험할 때마다 나는 부러움과 좌절감을 함께 느꼈다. 이 나라에는 환상적 평등주의에 빠져 국가경제를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도록) 망가뜨린 정부가 없었다. 생뚱맞은 자주정신으로 동맹을 자극해 나라를 고립시킨 정권도 없었다. 어렵게 도와준 돈으로 핵폭탄을 만들어 협박하는 고약한 이웃도 없었다. 활발하지만 조용하고, 분주하지만 질서 있는 사회는 관공서를 불태우고 죽창으로 경찰을 찌르는 우리의 시민 수준과 대조적이었다.
그런 좋은 나라를 교육에 극성스러운 한국 어머니들이 외면할 리 없다. 우리나라 조기 유학생 수가 한 해에 50%씩 늘어날 정도라는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 학생들이 값싸고 질 좋기로 세계에서 유명한 싱가포르의 공교육보다 대부분 현지 외국인학교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공립학교 공부가 워낙 세서 한국 학생들이 한두 학년 아래에 전학해야만 학업을 따라갈 수 있어 그렇다니 이 나라 교육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관리가 의욕 잃으면 국민이 피해
한국정부가 교육 평준화로 헛발질하고 있을 때 싱가포르는 엄격한 경쟁정책으로 우수학생 추리는 데 발 벗고 달려왔다. 그렇게 선발된 엘리트들은 영국 유학 후 공무원으로 채용되는데, 이 나라에서 공무원이 되는 것은 가장 소득 높은 직장에 들어간다는 것과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된다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비록 권력이 세습되는 정치 후진국이지만 국민이 자유로운 선거에서 여당 일색의 국회를 선택한 것은 엘리트 관료집단이 국민경제를 발전시켜 준 데 대한 일종의 사은품이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서 접한 첫 번째 국내 소식은 항공기 안에서 본 동아일보 1면 기사 ‘마음 떠난 공무원들의 좌절기’였다. 투쟁으로 잔뼈가 굵은, 그래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386 실세들의 등쌀에 이 나라 엘리트 관리들은 무력감에 빠지고 직업에 대한 자존심도 포기한 모습이다. 기사 내용이 생소하지 않은 것은 정권 후반기에 개인적으로 만났던 많은 공직자에게서 내가 직접, 그리고 자주 듣던 내용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사석에서 만났던 두 명의 국무위원급 인사도, 최근 2주 동안 점심을 같이했던 세 명의 중앙부처 국장도, 그리고 엊그제 만난 한 직업외교관도 몸은 관직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상태였다. 엘리트 공무원들이 맥 놓고 세월 가기만 기다리고, 민간으로 전업할 생각이나 하는 것이 옳은 자세는 아니지만 사정을 듣고 보면 그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관리들이 386 실세들과의 갈등 때문에 자존심 상해 일손 놓고 있을 때 싱가포르의 성장엔진은 맹렬하게 돌고 있었을 것이다. 관리들이 의욕을 잃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늘 그들을 고용한 국민이다.
국민은 2002년 말 대통령 선거 이전에 386 실세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학창시절 우수학생으로 선발돼 외국에서 엘리트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온 것도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동안 남다른 치세 경력을 쌓은 기미도 전혀 안 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의 군식구로 따라 들어와 관직을 점령한 후, 빨간 볼펜 들고 다니며 직업 관리들이 까만 볼펜으로 올린 국정 기안서에 붉은 줄이나 쳐 대면서 나라 꼴은 이 모양이 되기 시작했다.
국가 팔자는 국민이 만드는 법
과거 왕조시대에는 폭군이나 성군을 만나는 것이 순전히 백성의 운수소관이었다. 왕은 하늘이 내리고 세습에 의해 왕위에 오르는 것이지 백성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집권 세력이 총칼로 국민을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초법적 행동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도 아니다. 그들을 선택한 것은 이 나라 유권자들이다. 국가의 팔자는 국민이 만드는 법인가. 싱가포르는 참 운 뻗은 나라다. 짧은 해외 출장길에 느낀 단상은 그것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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