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의 그림 읽기]정적과 외로움 그리고 침묵

  • 입력 2006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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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크빈트 부흐홀츠, 보물창고 펴냄
그림=크빈트 부흐홀츠, 보물창고 펴냄
정적과 외로움 그리고 침묵으로 가득 찬 그림이 있다. 글 또한 그렇다. 글과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것들은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정적이요 외로움이며 침묵 같다.

그것들이 그다지도 생생한 것은 필경 오늘의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세계란 정적 대신 소음, 외로움 대신 그 즉각적인 해소, 침묵 대신 말의 홍수 속에 심신이 멍들고 허우적거리는 세계를 말한다.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이라는 이 작품집에 나오는 화가 막스 아저씨는 어느 섬에 있는 ‘나’의 집 5층으로 이사를 와서 그림을 그린다. ‘나’는 바이올린을 켜는 아이이고, 막스 아저씨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져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면 창가에 서서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른다.

자기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철저하게 감추며, 시선이 늘 먼 곳에 가 있는 막스 아저씨는 어느 날 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서 ‘나’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꽃에 물도 주고 우편물도 챙겨 달라고 부탁한다. 부두에서 배웅을 하고 돌아와 가슴을 두근거리며 화실의 문을 열어 본다. 문은 열렸고 화실은 달라져 있다. 벽을 향해 세워 놓았던 그림들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앞에는 연필로 그림에 대해 몇 마디씩 쓴 도화지 쪽지들이 놓여 있었다. 아저씨는 ‘나’만을 위해 전시를 해 놓고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나’는 막스 아저씨가 자기가 없는 동안 그림을 보게 한 이유를 천천히 깨닫는다. 그림에 대해 자기가 직접 설명해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을.

어느 날 아저씨는 돌아오지만, 멀리 자기가 살 새 집을 마련했다고 하면서 아주 떠난다. “예술가 선생님 보고 싶을 거예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부두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발만 바라보았고, 바닷물은 눈물처럼 짠 맛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막스 아저씨한테서 소포가 왔다. 그게 이 그림이고, 그림 뒤에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예술가 선생님, 선생님의 바이올린 선율은 언제나 내 그림 속에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글과 그림의 여운은, 우리의 범종 소리처럼 끝이 없다. 거기에는 참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요 없이는 마음이 없고, 침묵 없이는 참마음이 없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말에 침묵의 무한과 거기서 울리는 메아리가 있으면 최상의 말이다. 그리고 고요와 침묵의 샘은 잘 듣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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