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분석과 평가다. 한 전문가는 “대선을 앞두고 보수, 진보 양쪽의 표를 다 얻기 위해 저마다 중간에 서려고 한 결과”라며 이런 ‘눈치 보기’는 후보 간 차별화를 막아 선거를 정책 대결이 아닌 연(緣)이나 이미지의 대결로 몰아 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모두가 ‘중도’라면 이 정권 3년 10개월 동안 그토록 격렬하게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중도의 탈을 쓰고 있음이 틀림없다.
중도란 원래 좋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덕(德)과 정치의 요체를 중용(中庸)에서 찾았듯이 극단은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지 않다. 극단은 나를 제외한 모두를 배제의 대상으로 본다. 결과는 끝없는 대결과 싸움뿐이다. 그런 정치가 싫다면 공존과 타협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중도다. 한마디로 성숙한 민주주의가 곧 중도인 것이다.
대선 주자 6명 “나도 중도다”
나는 최근 친여(親與) 매체로 분류되는 몇몇 일간지에서 중도에 관한 비판적인 글들을 읽었다. “정치권이 손님을 끌기 위해 중도 과잉에 빠져 있으나 지금은 오히려 건전한 이념 논쟁을 더 권장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민심에 중도는 없다”고 아예 단언한 글도 있었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선거 때만 되면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비 중도에 대한 불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회색인(灰色人)을 백안시했던 지적(知的) 풍토 등이 그런 인식의 배경이 됐을 것이다. 연세대 박명림(정치학) 교수는 “우리 정치사는 승리와 패배의 역사만 있을 뿐 이익을 교환한 역사가 없다”고 했다. 중도가 뿌리 내릴 토양이 그만큼 척박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상황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본다. ‘보수의 흡인력’에 대한 좌파의 두려움이 중도에 대한 공격적 태도의 더 큰 원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좌파가 중도로 가다 보면 결국 우파 보수에 흡수되고 말 것이란 ‘공포’가 중도에 대한 강한 적의(敵意)로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사상 최저의 지지율로 막다른 골목에 밀린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처지부터 한몫했을 것이다. “어정쩡한 중도는 설 자리가 없다”는 그들의 결연한 외침 속에서 오히려 좌파의 초조함을 읽는다면 지나친 말일까.
넓은 의미에서 오늘의 남쪽 좌파는 누구인가. 1945∼48년 해방공간에서 좌우 합작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김구, 김규식 등 중도파를 통일운동의 대부로 삼는 사람들이 아닌가. 진정한 좌파라면 그들의 정신을 살려 이념 갈등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 우파보다 더 노력해야 옳다. 중도를 폄훼하고 “아직은 이념 투쟁이 필요하다”는 식의 선동적 언사로 대결을 조장할 일이 아니다. 분열과 갈등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 4800만 국민을 모조리 좌우로 나눌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멈춰야 한다. 합리적 좌파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한나라당 연금案지지한 참여연대
사회든 정치든 중심이 있고, 누구든 중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최근 좌파의 원군(援軍) 격인 참여연대와 민주노총이 한나라당이 제출한 기초노령연금법안에 지지를 표명한 것을 보고 놀랐다.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당사까지 찾아가 “연금 문제에 관한 한 한나라당이 가장 서민 보호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칭찬까지 했다고 한다.
세상도 정치도 이래서 조금씩 간격을 좁혀 가는 것이다. 대표적 우파인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여당의 일부 386 의원들이 북의 핵무장에 결사반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도와 중도를 지향하려는 의지를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선거철 한때의 풍경이라고 해도 그런 노력마저 없다면 우리 사회의 이 유별난 대립과 분열이 어느 세월에 가시겠는가.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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