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피부색도, 민족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이 공존공생하며 살았던 ‘로마’라는 제국이 지구상에 있었다고 알리고 싶은 거다.”
1992년 이래 1년에 한 권씩 15권.
‘로마인 이야기’(신초샤·新潮社)를 완간한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69) 씨가 16일 일본 도쿄(東京)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지금은 머리가 텅 빈 상태”라며 “요즘 ‘로마인 이야기’와 관련해 15년분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출판을 위한 작업을 마치고는 책이 나오기 전에 이탈리아로 떠나 그동안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의 말대로 9·11테러 이후 전 세계를 뒤흔든 종교와 문명의 충돌은 2000년 전 로마시대를 달리 보게 한다. 어떻게 로마만이 민족, 문화,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에까지 이르는 ‘보편제국’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들은 현실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란의 고통만큼 불행한 것은 없다는 진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로마인의 통치는 독특한 관용으로 일관됐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은 정복한 이민족의 신까지도 받아들였다. 속주를 우호국으로 삼아 인재를 등용하고 속주 출신 황제까지 배출했다. 여차하면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단이 출진해 광대한 영토를 지켰다. 이것이 ‘팍스 로마나’였고 공존공영의 정신에 의한 다민족 운명공동체였다.
이 점에서 그는 로마 ‘제국’은 적어도 과거 영국의 제국주의나 요즘의 미국과 전혀 다르다고 단언한다. “가령 대영제국은 간디를 요직에 등용하려 하지 않았고 미국도 힘은 강대하지만 로마처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윽고 로마제국의 공생 질서가 더는 기능하지 않게 되고 암흑의 중세가 찾아왔다. 제15권의 배경이 된 서로마제국 멸망(476년)과 이후 ‘지중해 수평선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7세기는 로마 문명이 종언을 고하고 일신교, 즉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때다.
“요즘 다시 중세가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마치 종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만 존재하는 듯이 보이니까. 로마인들이 실현한 ‘리얼리즘’의 지혜가 아쉽다. 하지만 나는 책에서 제언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무엇을 얻을 것인가는 독자에게 달렸다.”
지금까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전 6권) 등 수많은 로마에 대한 역사서가 있었지만 대부분 기독교도의 시각에서 정리된 것이었다. 그는 ‘다신교인 아시아인이 로마의 역사를 쓰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인 이야기의 영역(英譯)을 적극 추진할 생각이다.
그의 지도자론에서도 로마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고귀함에는 책임이 따른다)를 읽을 수 있다.
“리더는 조직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채우지 않는 인물이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 당시 한 개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해 준다. 그러나 로마에는 공공건물의 유적만 있다. 로마인들은 피라미드에 감탄하면서도 ‘죽은 단 한 사람보다는 살아 있는 많은 사람을 위해 다른 것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마키아벨리는 역량, 운, 시대와의 부합성을 리더의 3대 요건으로 꼽았다”면서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리더가 되기 힘들다”고 단정할 때는 역시 차가운 리얼리즘의 세계가 느껴졌다. 가령 네로는 최악의 황제였지만 그의 치세는 로마의 융성기였기 때문에 그가 만든 금융정책이나 외교정책 등은 후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역사에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나 스러져 가는 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
“인간의 재능이란, 운명이란 그런 거다. 역사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운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 재미있다.”
로마의 흥망성쇠를 통해 읽을 수 있는 국가 융성의 요인을 그는 기백, 즉 스스로를 보는 긍지에서 찾는다. 가장 나쁜 예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것. “밖에 적이 있는데 내부 싸움에 빠져 붕괴해 버린 아테네, 피렌체 같은 나라들이 그렇다. 작은 문제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친다. 일본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대표적인 예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독하는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내 단행본 문고 누계 부수는 774만 부. 한국에도 번역출간(한길사)돼 200여만 부가 팔렸다.
그는 15년간 여름방학도 없이 고문서부터 현대의 연구 성과까지를 정독하고 북아프리카부터 스코틀랜드, 옛 영토의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약 2만1000장의 원고를 쓰면서 버린 만년필만 5자루에 이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15년간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 “건강검진을 했다가 뭐라도 나오면 일이 중단된다. 물론 독자들은 기다려 줬겠지만 나로서는 한번 중단한 뒤 다시 시작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거다. 지금 병원에 가면 큰 병이 발견돼 곧 죽을지도 모른다.”(웃음)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독학으로 20년 준비한 大역사서▼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시오노 나나미 씨는 고교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심취해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정도로 ‘별난 소녀’였다.
가쿠슈인(學習院)대 철학과 시절에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으나 마키아벨리를 알게 된 뒤 회의를 느꼈다. 196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서양문명의 모태인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역사 현장을 찾아다니며 ‘놀면서’ 공부했다.
데뷔작은 1968년 일본에 귀국해 주오구론(中央公論)사에서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 그러나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1970년의 첫 장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으로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그해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했다. 이후 독학으로 이탈리아 역사를 공부하며 다양한 저서를 쏟아냈다.
그에게 ‘로마인 이야기’는 준비에만 20년, 집필에 다시 15년이 걸린 평생의 작업. 1992년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매년 1권을 발표해 15권으로 완성하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운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에 이르는 시기를 1∼5권 ‘융성기’, 6∼10권 ‘안정기’, 11∼15권 ‘쇠퇴에서 멸망’의 세 단계로 구성했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되 사료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은 상상력으로 보충하지만 허구에 빠지지 않는 독특한 글쓰기 스타일은 “서사는 좋아하지만 해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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