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이 21일로 100주년을 맞았다. 일제(日帝)는 당시 우리 경제를 침탈하기 위해 자기 나라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했다. 이에 따라 고종 황실은 도쿄에서 200만 원의 공채(公債)를 발행해야 했고, 이렇게 해서 생긴 외채가 1907년엔 총 1300만 원에 이르렀다. 황실의 빈약한 재정 상태로는 상환이 불가능했다. 국민이 이를 대신 갚아 국권(國權)을 지키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출판사인 광문사의 설립자 서상돈, 사장 김광제 선생이 제안한 민간 차원의 경제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
▷모금을 총괄하는 지원금수합(志願金收合)사무소가 설치됐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들은 후원 캠페인을 벌였다. ‘지금 우리의 국채 1300만 원은 대한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2000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모은다면…’(대한매일신보). 두 달여 만에 4만여 명이 동참했다. 서울 평양 진주 등 전국 각지의 기생들도 아끼던 금가락지 은가락지를 내놓았다.
▷대구에선 요즘 100년 전의 정신을 되살려 나라의 경쟁력을 키우자는 신(新)국채보상운동이 한창이다. 서·김 선생 흉상 제막, 우표 발행, 음악회, 전시회, 기념 오페라 ‘불의 혼’ 공연 등이 일주일간 이어진다. 우리는 불과 10년 전 ‘금 모으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뒤집어 보면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증거다. 이 운동의 정신은 살려나가야겠지만 정부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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