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은 ‘무능한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부도덕한 것은 없다’고 했고 ‘지도자는 희망을 나누어 주는 중개인이다’는 말도 남겼다. 21세기 대한민국 청와대에서 ‘아마추어가 아름답다’는 역발상 명언이 나왔다는 사실을 망자는 모를 터이다. 우리 국민은 지도자발(發) 희망을 잃은 지도 오래다. 빈곤층을 양산하는 지도자는 설혹 성직자 출신이라 해도 도덕적이라 할 수 없다.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는 간명하게 ‘지도자란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고 했다. 하지만 4년간의 실정(失政)으로 민생을 힘겹게 만들고도 오로지 재집권을 위해 탈당극(劇)과 신당극을 벌이는 정권에 책임을 지라면 ‘남 탓’으로 날밤을 새울 것이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에게는 해결이 쉬운 문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쉬운 문제들이라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해결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특히 핑계가 많은 청와대 사람들에게 ‘맞춤 명언’ 같다.
중국 제나라 정치가 관자(管子)는 ‘정치는 민심을 따르면 성공하고 민심을 거스르면 실패한다’고 가르쳤다. 2600년 전 패왕(覇王)의 시대에도 그게 진리였다.
잔꾀 부리는 자는 민심을 잃는다
역시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안자(晏子)는 ‘신하들이 모두 입을 다물어도 여론은 쇳덩어리를 녹인다’고 했다. 중국 병서(兵書) ‘삼략(三略)’에는 ‘아첨하는 신하를 중용하는 군주는 반드시 재앙을 만난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대통령비서들은 입을 다물기는커녕 요설(饒舌)로 국정실패를 덮으려 한다.
그러나 참모의 잘못이 먼저이겠는가.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훌륭한 군주는 훌륭한 신하를 두기 마련이다’고 했다. 중국 전한 때의 회남자(淮南子)는 ‘군주는 뿌리이고 신하는 가지와 잎이다. 뿌리가 나쁜데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는 없다’고 설파했다. 진나라 학자 왕량(王良)은 ‘군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먼저 그의 신하들을 보라’고도 했다. 현직 대통령뿐 아니라 차기 주자(走者)들과 유권자도 음미해 볼 말이다.
임기가 1년 남은 노무현 정부와 차기 지도자에게 참고가 될 말을 남긴 미국 대통령이 많다. 우드로 윌슨은 ‘가장 높은 능률은 자유로운 국민의 자발적 협조에서 나온다’고 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개인의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안정과 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정부는 국민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만 해야 한다’고 했다. 무리하게 세금 긁어 일을 벌이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무모함 또는 안이함도 무능과 무책임의 산물이다.
미국 성직자 제임스 클라크는 ‘정상배(政商輩)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다. 꿈같은 얘기이기는 하다. 중국 관자는 ‘대세를 내다보는 자는 민심을 얻고 잔꾀를 부리는 자는 민심을 잃는다’고 했다. 대선 주자들에게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올지 모르겠다.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은 ‘경쟁심에서는 훌륭한 행동이, 자만심에서는 고상한 행동이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아일랜드 비평가 버나드 쇼는 ‘선거는 도덕적으로 참혹한 일이며, 피만 흘리지 않았지 전쟁처럼 사악하다. 선거에 관여하는 자는 누구나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이다’고 했다. 올해 한국 대선은 진짜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긴장감마저 낳고 있다.
투표용지는 총알보다 강하다
남는 것은 유권자 몫이다. 루스벨트는 ‘민주주의의 최고 통치자는 대통령, 국회의원, 관료들이 아니라 바로 유권자들이다’고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투표용지는 총알보다 강하다’고 했고, 미국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대니얼 웹스터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이 투표용지에 달려 있다’고 했다.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는 ‘악의 승리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는 것이다’고 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버나드 바루크의 이 말은 또 어떤가. ‘공약을 가장 적게 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라. 그가 실망을 가장 적게 안길 것이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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