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좌파 경제는 안 맞는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는 이상(理想)은 아름답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역사의 종착지로 설파했고,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놈 촘스키도 1950년대 잠깐 살았던 키부츠를 고매한 연대(連帶)사회로 칭송했다.
그 이상향이 1980년대 중반부터 이스라엘 경제 침체 속에 흔들리고 있다. 40%가 파산했고 30%는 빈곤 선 이하다. 현재 인구의 2.6%가 사는 268개의 키부츠 중에 개인적 자유와 경쟁보다 사회적 책임과 평등이라는 좌파 이상을 고수하는 곳은 많아야 40개일 정도다.
‘진화’하는 키부츠는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데가니아도 1년 전 시장경제를 시범 도입했더니 별안간 수입이 늘고 복지지출이 줄었다. 빈둥거리던 사람들까지 일을 찾았다. “일과 보상을 연결시키니 모두에게 이익이더라”고 이 나라 노동당원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했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시장경제로 돌아선 지금도 좌파는 “방법이 잘못됐지 방향은 옳다”고 강변한다. 대통령은 2004년 탄핵사건 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별놈의 보수를 다 갖다 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 이거다”라며 진보를 그 대척점에 놨다. 이 말이 맞는다 치자. 거기에 교조적 진보, 유연한 진보, 별놈의 진보를 다 갖다 놔도 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평등의 한계: 키부츠의 통찰’이라는 지난해 논문에서 미 스탠퍼드대 랜 아브라미츠키 교수는 “생산성 높은 사람일수록 키부츠를 떠났다”고 했다. 상품과 자본 인력이 세계시장을 넘나드는 세계화 속의 자유 사회에선 어떤 이데올로기도 개인의 발목을 잡을 수 없다.
세계화와 함께 몰아닥친 기술정보화는 개인의 창의와 기업의 혁신에 놀랄 만한 부가가치를 안겨 주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독일과 일본에 추월당할 것을 걱정했던 미국 경제가 기술정보산업과 맞물려 눈부시게 성장한 것도 이 덕분이다. 요즘 유럽 경제의 회복 역시 집단논리와 시장규제에 억눌려 온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미국식 유연성을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영국은 1980년 영국병으로 고사(枯死)하기 직전에야 좌파 경제를 물리쳤고, 인도 역시 1990년대 경제 파탄을 맞고서야 시장을 받아들였다. 인도 출신의 미 컬럼비아대 교수 자그디시 바그와티는 “영국에서 좌파경제학을 공부했던 나와 만모한 싱(1990년대 인도 재무장관·현 총리)이 1950, 60년대 시장을 못 믿고 정부 간섭을 제도화했다가 개혁하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세계화와의 불화가 아니어도 별놈의 진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본성을 너무나 가볍게 본 데 있다. 서너 살 먹은 애들도 능력과 노력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민간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키워 주면서 정당한 노력엔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게 사회안전망을 갖춰야 자유민주 정부다. 있는 능력도 못 펴게 막고 노력하지 않아도 보상을 장담하는 정권이 진보라면, 진보(進步)라는 두 글자에 대한 모독이다.
그런 진보 가치는 봉하마을에서
“정치는 가치추구 행위이고, 이익보다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고 며칠 전 대통령은 밝혔다. 대통령의 가치가 어떻든 나라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배부른 가치만 붙들고 있을 순 없다. 자신만의 가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의 이익까지 차 버리겠다는 건 별놈의 진보 아니면 전체주의일 뿐이다.
‘고르게 잘사는 균형발전사회’ 같은 대통령의 가치는 봉하마을에서 추구하기 바란다. 평생 받는 연금까지 몽땅 내놓고 누구든 필요에 따라 퍼 가게 할 자신이 있다면 말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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