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일본인에게 여성 또는 약자의 존재란

  • 입력 2007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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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말에는 20세기를 회고하는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 포괄적인 것으로는 마이클 하워드와 로저 루이스의 ‘20세기의 역사’,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짧은 20세기 1914∼1991’ 등이 있고 그 밖에 나라별로 엮은 20세기사도 있다. 그중 나는 영국의 사학자브라이언 모이나한이 쓴 ‘영국의 세기’와 ‘러시아의 세기’, 독일의 사학자 미하엘 슈튀르머가 쓴 ‘독일의 세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 겨레가 그 속에서 반세기를 시달려 온 ‘일본의 세기’가 궁금했으나 책을 못 찾고 있던 판에 근래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란 작가가 쓴 ‘쇼와시(昭和史)’와 그의 ‘전후편(戰後篇)’이 나와 읽어 봤다.

일본의 20세기를 그냥 쇼와(昭和) 시대의 역사라 한 것은 그럴 만하다. 내가 알기엔 진짜 ‘영국의 세기’라 할 19세기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유럽 최장수 왕조 합스부르크 가의 마지막 프란츠 요제프 황제(1830∼1916), 일본의 쇼와 덴노 히로히토(裕仁·1901∼1989) 등은 셋 다 80세 이상 살고 60년 이상을 재위한 군주의 트리오다. 재위 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68년, 빅토리아 64년, 히로히토 63년의 순이나 1921년부터 정신병을 앓던 부왕의 섭정을 한 시기까지 합치면 히로히토도 실은 68년 가까이 재위한 셈이 된다.

패전 직후 ‘미군 위안부’ 모집

나는 어려서 일제강점기를 살았기에 1945년 이전의 쇼와 시대는 그리 낯설지 않다. 낯설고 궁금한 것은 1945년 이후의 전후편이다. 그래서 그를 읽어 보니 과연 놀라운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예컨대 일본인의 변신의 날렵함. 어제까지 “귀축미영(鬼畜米英·도깨비 짐승 같은 미국 영국)에 대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결사 항전해서 일억총옥쇄(一億總玉碎)하겠다”고 떠벌리던 일본이 패전 다음 날부터 “이젠 아메리카다” “민주주의다” 하며 돌아서 버리는 사례의 압권으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패전하면 여자들은 모두 미국인의 첩이 된다”고 했던 악선전을 그들은 정말 믿었던 것일까.

일본 내무부가 중심이 되어 연합군의 일본 진주를 맞기 위해 1945년 8월 18일 대책을 마련했다. ‘양가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 ‘방파제’로 일본 진주군에 서비스하기 위한 ‘특수위안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설립하고 ‘위안부 모집’을 시작했다. 패전 3일 후부터!

각 시도에 ‘서비스 걸’을 모집하라는 지령이 내려가자 매춘을 단속해야 할 경찰서장들이 나서 “국가를 위해 매춘을 알선해 달라”고 사방에 부탁하며 돌아다녔다. 당시 RAA의 이사 한 사람이 재무부의 주세(主稅) 국장을 찾아갔다. “얼마 필요해?”라고 묻기에 “1억 (엔) 정도”라고 대답하자 국장은 “1억으로 (양가 자녀의) 순결을 지킬 수 있다면 싸군” 했다는 것이다. 그 주세 국장이 도쿄 올림픽 당시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고.

다음 얘기도 재미있다. 1949년 10월 5일. 희대의 강간 살인마의 사형이 집행됐다. 장 보러 온 여성들을 속여 금품을 뺏고 수십 명을 강간하면서 저항한 일곱 명은 살해했다 체포되었다. 그가 붙잡힐 때 이런 말을 내뱉었다던가. “중국 종군(從軍) 때 맛본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양심적 일본인 반성의 목소리

물론 양심적인 일본인도 적지 않다. ‘쇼와시’의 저자 한도는 종전 당시 중학교 3년생이었으나 나는 초등학교 6년생.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나이였다. 중국에서, 난징(南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려 준 것도 그러한 양심적인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한 출판업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현대사의 흐름을 돌이켜 볼 때 사람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두 사건의 인상이 강렬하다…하나는 1937년에 일어난 난징 사건으로 일본 군대가 난징 점령 후 무고한 시민에 대한 약탈 방화 고문 강간 등의 결과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살인을 자행한 사건이다…다른 하나는 1940∼45년에 나치스 철학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강제수용소의 조직적 집단학살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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