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20>하인리히 슐리만 자서전

  • 입력 2007년 3월 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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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가 틀렸어요. 예러는 틀림없이 트로이를 봤어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어요.” “얘야, 이 그림은 상상으로 그린 거란다.” “아버지, 만일 정말로 그런 성벽이 옛날에 있었다면 완전히 없어졌을 리 없어요. 틀림없이 그건 수백 년 동안 흙먼지에 묻혀 있을 거예요.”》

현실은 꿈을 이루는 과정이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더욱이 아주 어릴 때 만난 책은 한 인간의 일생을 지배하기도 한다. 책은 인간의 호기심과 열정과 집착을 끝없이 부추기는 강력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여덟 살이 될 무렵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어린이를 위한 세계사’라는 책을 읽고 트로이 유적을 발굴하겠다는 뜻을 품었고, 평생을 그 꿈을 이루는 데 바쳤다.

인간이 꾸는 꿈은 늘 ‘지금 이곳’이 아니라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혹은 아예 현실 너머의 아득한 곳에 있기 마련이다. 어린 슐리만은 생생한 삽화가 그려진 역사책을 보는 순간 ‘그때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를 꿈꾸기 시작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문학적 허구로 존재하던 트로이가 한 소년의 가슴에서 역사적 현실로 발아한 것이다.

슐리만은 자서전의 서두에서 ‘나의 인생 후반기에 진행됐던 모든 발굴 작업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여러 가지 감명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필연의 결과였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감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불타는 트로이 도시 속을 아이네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은 채 어린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고 빠져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며 가슴 벅차하던 일이야말로 그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었음이 분명하다.

열성적으로 고대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와 나중에 커서 결혼한 뒤 함께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약속한 동갑내기 여자 친구 민나 덕분에 끝없이 샘솟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을 빼놓으면, 슐리만의 어린 시절은 불우하기 짝이 없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가난한 목사인 아버지는 슐리만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비용을 댈 수 없어 실업중학교를 마치고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가 생활에 정신없이 바쁠 때에도 나는 트로이를, 그리고 언젠가 그곳을 발굴하겠다고 30여 년 전 아버지와 민나에게 했던 맹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나의 금전에 대한 집착도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 평생의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 때문이었다’는 자서전의 한 대목을 보면 그는 철저한 현실주이자이며 동시에 낭만적 이상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낭만적 러브 스토리는 해피엔드가 아니었지만 그는 마침내 트로이를 문학적 허구에서 역사적 사실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부를 축적하는 데 급급한 상인이었다고 말하든, 낭만적 상상력에 기댄 단순한 발굴가였다고 부르든, 그리스의 고대 유적을 입증한 위대한 고고학자였다고 평가하든 그에겐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신형건 아동문학가·푸른책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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