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지키기 한평생
이희승 선생은 19세기 말(1896년)에 태어나서 국어학자로, 시인으로, 문장가로 활동하면서 이 땅의 지성인으로 살다 갔다. 이 책은 저자가 80세가 넘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쓴 자서전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36년, 제1, 2차 세계대전, 미군정, 6·25전쟁, 자유당과 민주당 정권, 군사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겪으며 기구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문화, 특히 국어를 지키고 키운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내용을 기록한 저술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은 소년이 보고 들은 일들, 당시로서는 생소한 언어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가출한 일, 한성외국어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학교를 거쳐 중앙학교를 20세가 되어서야 졸업한 일, 3·1운동 때 태극기를 그려 돌리면서 만세를 불렀고 동지들과 등사판으로 지하신문을 만들어 돌린 일…. 이 같은 일화들이 입지전적인 기록으로 펼쳐진다.
재수를 하면서까지 조선어문학과가 있는 경성제국대 예과에 30세의 만학도로 입학하여 드디어 언어학 공부의 꿈을 이루었고 대학의 낭만을 즐기며 친구들과 어울리던 일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화여전 교수로서 여성 문인들을 길러낸 일,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국어생활을 생각할 때 길이 찬양될 일이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악랄한 고문을 받았고 굶주림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동지들이 죽어나간 일들은 개인의 고난이자 우리 문화의 시련이었다. 출옥하자마자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폐사 직전에 있던 국어를 살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경성대를 재건하기 위한 일을 맡아 교수가 된 것은 우리 문화의 재건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 땅 비극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도 많다. 6·25전쟁 중 9·28수복 전날, 전투의 와중에서 한밤중에 집이 불에 타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몸만 빠져나온 일이나, 1·4후퇴 때 부산까지 1000리 길을 걸어갔다가 어머님의 임종에 겨우 맞춰 돌아와, 흩어진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찾은 일이 그것이다.
그는 4·19혁명 때는 교수 시위에 앞장섬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하게 했다. 이는 그의 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정년퇴직 후 동아일보 사장, 사립대의 대학원장, 동양학연구소장을 거치면서 한가롭게 쉴 틈이 없었던 것은 그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지만 몸에 밴 근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풍현 한국어문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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