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혁명 시대에, 사이버 게릴라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를 그릴까.
이미 국내에서 체 게바라의 생애를 다룬 전기가 수십만 부 팔렸다고 하고, 뒤이어 사진첩도 나왔고, 그가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번역되었다. 후자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영화로도 소개되어, 멋진 로드무비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런 붐을 타고 ‘체 게바라 자서전’도 출간되었다. 왜 하필이면 체 게바라일까. 68세대의 잃어버린 향수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일까. 이상주의를 갈구하는 젊은 세대의 길 찾기의 일환일까. 아니면 독일풍의 교양소설로 읽히는 것일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성장소설 말이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풍기는 묘한 아우라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게릴라로 죽었지만 불멸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쿠바산 시가 몬테크리스토를 피우는 모습은 가히 베네통 광고 사진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게릴라 이전에 지극히 사적(私的)인 인간이었다.
여행 중에도 일기장을 꼼꼼히 챙겼고, 틈틈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쳤으며, 마지막에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수행할 당시에도 글을 남겼다. 결코 게릴라답지 않은 독서광이기도 했다. 글을 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의 감상을 노트에 남겼고, 솔직담백한 작가 비평까지 곁들였다. 게릴라 아지트에서 시가를 피우며 괴테를 읽는 독서삼매의 사진을 보노라면 독서 취향도 얼마나 자유분방한지 알 수 있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그에게 강요된 관료적 생활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초기에는 “베트남을 여러 군데 만들자”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누비며 반제(反帝) 전선 투쟁에 몰입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베텔하임이 계획경제의 초기 단계에 물질적 유인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을 때 그는 정신적 자극이 중요하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천식이 심해지면 늘 게릴라적 삶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낭카우아수 계곡에서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 자서전의 전반부는 일종의 여행기이다. 전도유망한 아르헨티나 중류층 출신의 한 의학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대륙에 제도화된 빈곤과 불의에 분노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마야와 잉카 유적지 앞에서 그는 아메리카 대지의 뿌리와 하나가 됨을 느낀다.
이성형 이화여대 교수 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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