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출근 시간 전이면 많은 사람이 올라와 체조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하고 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한산한 숲길입니다. 서북쪽 비탈의 어느 소나무 밑에 어떤 남자가 입에 담배를 피워 물고 허연 헝겊 조각을 열심히 나무에 잡아매고 있었습니다. 지나면서 보니 그가 골똘한 채 매달고 있는 것은 네모난 현수막입니다. 거기에는 굵고 붉은 글씨로 ‘산불 조심’이라고 찍혀 있습니다. 온갖 건물과 도로와 각종 시설물에 다 빼앗기고 겨우 남아 있는 이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산과 숲인데 그것마저 그냥 두고 보지 못해서 허연 헝겊에 이런 ‘관청만의 구호’를 갖다 매다는 발상의 나태함, 꾸역꾸역 산을 기어 올라와 그걸 매달며 바로 그 밑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 자가당착이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 남자는 담배꽁초를 그 현수막 밑 길바닥에 발로 쓱쓱 비벼 끄고는 사라졌습니다. 담뱃불은 위험하지만 잘 껐으니 다행입니다. 현수막은 보기 흉하지만 철거하면 그만입니다.
아카시아만 무성하던 그 산의 정상을 몇 년 전부터 각 구청에서 경쟁하듯 손질하여 아름다운 공원으로 꾸며 놓고 예쁜 정자도 지어 놓았습니다. 물론 잘해 본다고 그랬겠지요. 정서를 함양하자고 그랬겠지요. 공원 오솔길 세 갈림길, 눈에 잘 띄는 곳에 큰 자연석을 세우고 거기에 턱하니 ‘시’를 한 편 새겨 놓은 겁니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이 차례 오지 않나 싶어 법석인 이 나라인데, ‘매봉산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그 ‘시’를 여기에 인용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겠네요. ‘해 오르는 마음으로/정든 매봉산 오르면/확 트여오는 눈앞에/하늘 푸른 한강물 흘러가고/동호 큰 다리의 차 물결도/씩씩하게 내닫는다…/새 힘이 솟는 팔다리/튼튼해지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아! 상쾌하구나, 참! 보람차구나!’ 이 ‘불조심’ 같은 ‘시(詩)’를 한 나라 수도 한복판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돌에 새겨 놓은 겁니다. 그래도 좀 자신이 없었는지 작자의 이름 앞에 구태여 ‘시인’이라고 ‘직업’을 밝혀 놓았습니다. 시인과 관리들이여, 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어리석음이 지워지지 않고 천추에 남아 이어지나니.
김화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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