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답사기 30선]<2>길 위의 삼국유사

  • 입력 2007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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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빈터에서 길손은 마음과 가슴의 눈을 열어야 한다. 마음과 가슴의 눈을 열어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지 않고서는 좀체 잡히지 않을 모습들이 있다. 그렇기에 길손의 상상력은 한없이 날개를 단다.》

과거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옛 터전을 찾아가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유적지 답사는 활자화된 텍스트라는 평면적인 역사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생생한 역사를 체험하게 해 준다. 세월의 흐름을 뚫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 돌 하나에서 우리는 수백, 수천 년 전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읽는다.

‘길 위의 삼국유사’는 일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체험을 통해 ‘삼국유사’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고자 한다. 저자는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의 길을 출발점으로 ‘삼국유사’의 주요 무대인 경주를 조명하고 있으며, 일연이 승려로 입문한 강원도 진전사(陳田寺)를 마지막으로 이 책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은 일연의 삼국유사가 단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으로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의 인생 지침서로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저자는 13세기 일연의 자취를 좇아 과거로 가기도 하고, 과거 속 인물들을 21세기 현재로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삼국유사의 무대가 된 장소에서 현재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동시에 살펴본다. 과거와 현재의 삶을 중첩시키면서 시간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 삶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역사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끝없이 현재와 소통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가 본 삼국유사의 의미는 이 땅에 살다 간 이름 없는 이들의 생애를 고스란히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일연의 마음이 되어, 선운사에서 묵묵히 차밭을 가꾸고 있는 우룡 스님, 진평왕릉을 바라보는 박노해, 마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식당을 운영하는 우리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삼국유사를 새롭게 기록한다.

길은 멈춰 있으면서도 움직이고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자,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삶을 모두 투영하는 원형적인 공간이다. 20년간 삼국유사를 연구한 저자는 곱씹어서 책을 읽듯 여러 번 현장을 답사하면서 텍스트의 행간을 읽고, 텍스트의 새로운 면을 다시 발견해 내고 있다. 탑 하나 덩그러니 남은 절터를 여러 차례 답사하면서 13세의 감수성 예민한 청년 일연의 생각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하여 일연과 함께 숨쉬고 마침내 일연의 마음이 된다. 그 열정이 짧은 글, 빠른 독서에 익숙해진 우리 시대에 귀하게 느껴진다.

빈 터는 역사적 상상력이 태어나는 근원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존재했던 것의 흔적을 통해, ‘스러진 전각을 세우고 탑을 일으키고 담을 둘러쳐서’ 과거 옛 사람들의 형상들을 찬찬히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빈 터에 서서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 새롭게 생겨나는 것에 대해 숙고할 때마다 삼국유사의 텍스트는 상상력을 안고 다시 태어난다. ‘길 위의 삼국유사’는 저마다의 마음으로 새롭게 쓰일 답사기를 위해 길을 나서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조윤경 이화여대 교수 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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