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무렵 일본에서 교포들의 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엔 호된 야단을 맞기도 했다. 도대체 학생 지도를 어떻게 하기에 대학이 밤낮 그 모양이냐는 핀잔이었다. 좀 억울한 생각도 들어 정색을 하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연세대 캠퍼스에서 하는 데모가 모두 연세대 학생의 데모는 아니었다. 다른 대학 학생도, 아니 일반 사회단체도 당시 데모를 할 때엔 곧잘 연세대에 몰려들어 시위를 하곤 했다.
시위대가 연세대를 선호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다. 광화문에서 차로 15분 거리니 가까워 모이기 좋고, 사방으로 문이 나 있어 도주하기 좋고, 부상자가 나더라도 바로 옆에 대학병원이 있어 좋고, 뭣보다 학교 정문 앞에 철길의 언덕이 있어 내외신 사진기자가 시위의 전모를 촬영하기 좋고, 특히 시위 주최 측은 그로 인해서 국내외에 홍보 효과를 떨칠 수 있어 좋았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시위의 현대사
그래도 “우리들 재외 교포는 학생 시위가 있으면 조국에 대한 근심으로 잠을 못 자는 애국자들입니다” 하고 야단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엔 하는 수 없이 학생 시위가 서양에서 들여온 못된 외래문화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라고 헤식은 변명을 늘어놓기도 했다.
공론의 언로(言路)가 열렸느냐 막혔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갈린다고까지 했던 조선 시대엔 신분 계층에 따라 여러 갈래의 의사전달 통로가 있었다. 벼슬이 높은 당상관에게는 임금의 어전에서 직접 주청하는 구두의 언로가 있었고 벼슬이 낮거나 벼슬 않고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선비에게는 그들대로 뜻을 상소(上疏)로 적어 올리는 글월의 언로가 있었다.
말로도 글로도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엔 다시 벼슬에 따라 궁궐의 안, 또는 밖에서 몸으로 소청하는 언로가 있었다. 곧 시위의 전통문화이다. 몸의 언로인 시위도 벼슬에 따라 방식이 정연하게 계층화됐던 가운데 성균관 유생이 하는 시위는 권당(捲堂) 또는 공관(空館)이라 일컬었다. 일종의 동맹휴학이라고 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대학생 시위의 원조인 셈이다.
3·1운동(1919년), 6·10만세운동(1926년), 광주학생운동(1929∼30년) 이후에 태어난 나는 일제강점하의 시위는 직접 보지 못했다. 대신 광복 이후에는 1945년 말의 반탁 찬탁 시위부터 시작해서 모든 정권하의(인공 치하도 포함해서) 모든 쟁점을 둘러싼 거의 모든 시위를 목격하며 살아 왔다. 광복 후 60여 년의 한국 현대사는 시위의 현대사라 해서 과장이 아닐지 모른다.
시위문화의 금자탑은 맨주먹의 시민적 항의로 이승만 권위주의 정권과 신군부 정권의 퇴진을 가져온 1960년의 대학생-교수 시위와 1987년의 학생-시민 시위를 들 수 있다. 시위문화의 가장 타락한 바닥은 5·16 전야 민주당 정권하의 시위이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시위가 있었다.
‘시위 정치’ 이젠 자제할 때
당시 어느 언론인은 “한국에 ‘데모크라시(민주정치)’는 없어도 ‘데모-크라시(시위정치)’는 있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시위로 쟁취한 제2공화국이 시위로 망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중고교생도 시위하고 공무원도 시위했다. 마침내 초등학생이 시위하고 경찰관까지 시위하면서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독재체제에 대한 항의 시위에는 끝이 있다. 어느 한쪽이 무너짐으로써. 그러나 민주체제하에서의 시위에는 끝이 없다. 결코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요구들을 항용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새로운 독재자가 나오거나 스스로 적당한 선에서 자제하기 전에는….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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