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뜨거운 교육열이 놓치기 쉬운 것

  • 입력 2007년 4월 24일 19시 21분


조승희가 NBC에 전달한 ‘멀티미디어 선언문’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해석이 안 되는 난해시(難解詩) 같다면 시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정신질환자가 흔히 보이는 분노 공격성 과대망상 피해의식 같은 것들이 표현을 바꾸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 유력지의 사설과 전문가 칼럼은 대체로 느슨한 총기 관리, 방치된 정신질환자의 위험성,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캠퍼스의 안전 문제를 짚었다. 인종 문제를 다룬 글을 쓴 사람은 한국계 교수들이었다.

고립감 증대시키는 사회환경

노스이스턴대의 제임스 앨런 폭스 형사사법학 교수는 32명이 죽은 버지니아공대 사건이 최악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매년 20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폭스 교수는 다중(多衆) 살해범의 특성으로 가족이나 친구의 정서적인 보살핌이 없는 고립된 환경을 들었다. 그는 전통사회의 붕괴로 나타난 높은 이혼율, 교회에 다니는 신도의 감소,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도시생활의 폐쇄성이 고립감을 증가시킨다고 분석했다.

고교 급우(級友)들이 조승희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행동장애가 있었던 것 같다. 조승희는 캠퍼스에서 다른 학생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던 외톨이였지만 컴퓨터를 비롯해 멀티미디어 장비를 다루는 데는 능숙했던 모양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연결이 잘돼 있으면서 동시에 주변과 완벽하게 차단된 세계를 만든다. ‘사이버 키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세계 모든 곳과 접속하지만 정작 가까운 곳의 가족 이웃 친구와는 단절돼 있다. 조승희 사건으로 사내아이 자녀를 둔 부모들의 걱정이 커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문을 닫고 컴퓨터 폭력물 게임에 빠져 버리는 아이들이 주위에 흔하다. 컴퓨터가 다양한 재미와 스릴을 제공하기 때문에 현실세계와의 접촉은 점점 시들해진다.

이 사건으로 가장 고통스러워할 사람은 조승희의 가족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의 가족사를 담은 장문(長文)의 기사를 게재했다. 조승희의 부모는 각기 다른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며 두 자녀를 대학에 보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으면서도 딸이 프린스턴대를 졸업하던 날 딱 하루를 쉬었다고 세탁소 주인은 말한다. 조승희의 누나는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 다 합격했지만 장학금 조건이 좋은 프린스턴대를 택했다. 그녀는 활발한 대학생활을 하며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의 공장을 시찰하는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에서 남매가 함께 자랐지만, 누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됐고 동생은 부자에 대한 적개심을 품은 청소년으로 자랐다. 조승희의 부모는 아들의 행동이 병적 증상을 보였음에도 적절한 치료를 해 주지 못함으로써 참극을 잉태했다.

성공 이전에 정신이 건전한 인간

정신질환자에게 자유의지에 따른 자기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을지, 가정이나 사회환경과의 인과관계는 어느 정도인지, 인간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정신질환은 뇌 구조와 신경전달 물질의 이상에서 비롯된다는 근거도 과학계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질환 인자’라는 탄환이 장전된 권총도 주위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고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교육열은 자녀 교육을 위해 부모가 국내외로 갈라져 사는 기러기 가족이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가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자녀의 정서 함양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부모의 압박 때문에 희망이나 소질과 관련 없는 ‘쇼트커트 진로’를 준비하던 자녀들이 극단적인 좌절을 겪는 경우도 더러 보게 된다. 한국인들이 자녀의 성공 스토리에 집착해 사고와 정신이 건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꿈을 팔아 기부금 모으는 총장(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물처럼 부드럽게 돌처럼 강하게(강신호 전경련 회장)
공민학교 소년이 법무부장관 되다(김성호 법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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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삶(영화배우 최은희)
변화하는 노동운동에 앞장선다(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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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본다(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
경쟁력 있는 사학운영의 꿈(이돈희 민족사관고 교장)
경제를 끌고 가는 힘은 기업에서 나온다(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
황호택이 만난 인생리더 10인
지은이 : 황호택
가격 : 11,000 원
출간일 : 2006년 11월 24일
쪽수 : 351 쪽
판형 : 신국판
분야 : 교양
ISBN : 8970904956
비고 :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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