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문명과 역사에 대한 지식 없이 그리스나 터키,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처음 느끼는 것은 자신의 엄청난 무지다. 초창기 인류 역사가 싹튼 이 땅에는 유적지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전설과 사연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런 무지를 마주한다는 일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떤 사람은 무지 앞에서 좌절하고 애써 이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그런다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외면하려는 것은 그 사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무지를 떨쳐 버리기 위해 어려운 도전을 선택한다. 괴롭기는 하지만 개척자 정신을 갖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우면서 무지를 정복해 나간다.
이 기행문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바로 이런 도전 정신의 소유자다. 도쿄(東京)대를 나와 일본 최고 지성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가 1972년 겨울 시칠리아의 셀리눈테를 우연히 들렀을 때, 잘 보존된 거대하고 멋진 그리스 신전들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만다. 그곳에 그런 유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시에 대한 역사 기록이 부족해서 각 신전이 어떤 신에게 바쳐졌는지 모르기에 그냥 A, B…O라고 알파벳으로 불리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눈앞에 보이는 신전이 이토록 멋지게 보존되어 있는데도 이 신전이 어떤 신전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면, 기록된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아닐까.’
그리곤 자신이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역사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후 그는 홀린 것처럼 고대 유적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 같은 지적 모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마침내 1982년 그리스 터키 여행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본격적인 취재 여행이었다.
40일 동안의 여행에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길을 돌아간다. 마치 일주일이면 도착할 이타케를 20년 동안이나 표류했던 오디세우스를 닮은 모험이다. 그 길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과거의 위대한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쓰이지 않은 역사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맞아 들어가는 지적 희열을 맛본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그리스발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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