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에게 해를 본 적이 있는가? 햇빛은 눈부시고 물은 깊은 청람색. 천지는 황혼이다. 태양에 녹은 신비한 묵색은 정령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려 한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흐려져 버린다. 저렇게 깊고 고운 푸른색 물속에서라면 죽음마저도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속에 뛰어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바다는…. 햇빛이 강렬하고 물색이 고울수록 조심할 일이다.’(‘화첩기행’ 3권 가운데 ‘김우진·윤심덕과 현해탄-그윽한 물빛 위 떠도는 사의 찬미’에서)
저자 김병종의 붓끝을 따라 천재 작가 김우진과 절세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자취를 더듬어 가다 보면 한 세기 전, 문명의 동이 트기를 기다리기 힘겨워했던 두 사람의 영혼이 저자를 통해 문득 책을 읽는 나에게로 스며들어 오는 듯하다. 저자는 이렇게 먼저 떠난 예술가들의 차가운 흔적에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담아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은 저자의 글과 그림 재주를 유감없이 내보이고 있다. 유려한 문체와 지적인 어휘, 청량한 그림만으로도 하고많은 기행문 중에서도 이 책은 단연 돋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슴에 오래 남는 이유는 앞서 간 예술인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존경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기행문만큼 저자의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은 없다. 저자와 여정을 함께한 화첩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맑은 눈과 뜨거운 가슴을 그대로 전한다. 이 책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비견될 만하면서도 우리의 정서를 매료시키는 훈훈함에 있어서는 단연 한 수 위다. 윤선도의 보길도, 정지용의 옥천, 이인성의 대구, 이응로의 파리, 채만식의 군산, 박수근의 양구, 정선의 금강산 등 우리 예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연초에 고창엘 다녀왔다. 서정주의 시비와 아직 꽃망울도 피지 않은 동백나무 숲을 뒤로 하고 선운사 절문 앞에 늘어선 장어 집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진짜 복분자술과 함께 풍천장어를 맛보고 싶었다.
“이제 풍천에는 장어가 안 나요. 다 수입이지 뭐….”
장어 집 주인의 대답이 웬만하면 원망스러웠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풍천장어 맛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창으로 내려가는 길 내내 ‘화첩기행’ 1권의 ‘서정주와 고창’ 편에 실린 저자의 그림 ‘학의 다리를 무는 풍천장어’가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그 그림 속 장어는 늘씬한 학의 다리를 물고 늘어져서는 미끈한 허리로 물을 가르는 품이 금방이라도 물이 튈 듯 싱싱했다. 그림 한 장을 한숨에 다 그린 듯 붓이 한순간도 쉰 흔적이라곤 없었다.
조윤선 한국씨티은행 부행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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