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답사기 30선]<22>화첩 기행 1, 2, 3

  • 입력 2007년 5월 7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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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예나 이제나 이것은 나의 꿈입니다. 나만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기를 소망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창을 통해 바라본다면 고달픈 세상살이도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지러운 풍경들도 훨씬 정돈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예술의 힘입니다.》

‘7월의 에게 해를 본 적이 있는가? 햇빛은 눈부시고 물은 깊은 청람색. 천지는 황혼이다. 태양에 녹은 신비한 묵색은 정령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려 한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흐려져 버린다. 저렇게 깊고 고운 푸른색 물속에서라면 죽음마저도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물속에 뛰어들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바다는…. 햇빛이 강렬하고 물색이 고울수록 조심할 일이다.’(‘화첩기행’ 3권 가운데 ‘김우진·윤심덕과 현해탄-그윽한 물빛 위 떠도는 사의 찬미’에서)

저자 김병종의 붓끝을 따라 천재 작가 김우진과 절세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자취를 더듬어 가다 보면 한 세기 전, 문명의 동이 트기를 기다리기 힘겨워했던 두 사람의 영혼이 저자를 통해 문득 책을 읽는 나에게로 스며들어 오는 듯하다. 저자는 이렇게 먼저 떠난 예술가들의 차가운 흔적에 자신의 따뜻한 체온을 담아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은 저자의 글과 그림 재주를 유감없이 내보이고 있다. 유려한 문체와 지적인 어휘, 청량한 그림만으로도 하고많은 기행문 중에서도 이 책은 단연 돋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슴에 오래 남는 이유는 앞서 간 예술인들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존경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기행문만큼 저자의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은 없다. 저자와 여정을 함께한 화첩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맑은 눈과 뜨거운 가슴을 그대로 전한다. 이 책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비견될 만하면서도 우리의 정서를 매료시키는 훈훈함에 있어서는 단연 한 수 위다. 윤선도의 보길도, 정지용의 옥천, 이인성의 대구, 이응로의 파리, 채만식의 군산, 박수근의 양구, 정선의 금강산 등 우리 예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연초에 고창엘 다녀왔다. 서정주의 시비와 아직 꽃망울도 피지 않은 동백나무 숲을 뒤로 하고 선운사 절문 앞에 늘어선 장어 집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진짜 복분자술과 함께 풍천장어를 맛보고 싶었다.

“이제 풍천에는 장어가 안 나요. 다 수입이지 뭐….”

장어 집 주인의 대답이 웬만하면 원망스러웠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풍천장어 맛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다. 고창으로 내려가는 길 내내 ‘화첩기행’ 1권의 ‘서정주와 고창’ 편에 실린 저자의 그림 ‘학의 다리를 무는 풍천장어’가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그 그림 속 장어는 늘씬한 학의 다리를 물고 늘어져서는 미끈한 허리로 물을 가르는 품이 금방이라도 물이 튈 듯 싱싱했다. 그림 한 장을 한숨에 다 그린 듯 붓이 한순간도 쉰 흔적이라곤 없었다.

내 눈 앞에도 저자의 화첩과 같은 풍광이 펼쳐지기만 한다면 저자가 애정과 존경으로 되살려 놓은 앞서 간 예인의 체취를 느낄 수만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 나의 다음 행선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몇 번이나 읽은 책을 오늘도 다시 뒤적인다.

조윤선 한국씨티은행 부행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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