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민족병’ 치유 통합지도자 그립다

  • 입력 2007년 5월 7일 03시 01분


영화를 보고 고전적 감동을 받기란 쉽지 않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과(過)한 기대를 접고 매사에 덤덤해지는 나이 탓이다. 그러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봤을 때는 뻐근한 감동을 받았다. 거지꼴을 한 주인공 슈필만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독일군 대위는 그를 구해 준다. 은신처로 빵을 갖다 주고 마지막에는 외투까지 벗어 준다. 뒷얘기가 궁금해서 대본인 슈필만의 회고록을 구해 보았다. 슈필만 말고도 그 대위가 구해 준 사람이 더 있었다. 1949년에야 호젠펠트 대위의 신원을 확인한 슈필만은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소련 동무들’ 때문에 손을 쓸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대위는 1952년 스탈린그라드의 포로수용소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유대인을 구해 줬다고 말했다가 거짓말 말라고 도리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유대계 폴란드인 슈필만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바르샤바에서 살아남은 얘기를 적은 ‘피아니스트’는 1946년에 초판이 나왔으나 곧 발매 금지를 당했다. 나치 점령지에서의 러시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의 부역 사실이 생생히 적혀 있다는 것이 당국자에겐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1990년대 말에야 재판이 나와 외국어로 번역이 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숨기고 싶은 천사표 독일군

초판본에서 슈필만은 생명의 은인을 오스트리아인으로 해야 했다. 용감하고 따뜻한 독일인 장교가 나오는 책을 종전 직후의 폴란드에서 발간하기란 불가능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당연한 적개심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그런 천사표 독일인이 있을 수 없다! 아니 그런 독일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용서되지 않는다!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논어에 “10가구 되는 작은 마을에 충성하고 믿음직스럽기가 나와 같은 사람은 있겠지만, 나와 같이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학문을 권장하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인간 일반에 대한 발언으로도 읽을 수 있다. 조그만 동네라도 어진 자가 한 명쯤 있게 마련이고 반역과 모반의 거리에도 의인이 있는 법이다. 폴란드는 50년이 지나서야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리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견 학자들의 공동연구인 ‘조선토지사업 연구’에는 흥미 있는 연구 결과가 제시돼 있다. 토지조사사업 추진 과정에 일제의 물리적 폭력이 사용된 흔적이 없고 조사과정이 능률적이고 공정하게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학문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탐구이지 주관적 선입견의 확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연구 결과를 언급하면 공격적 시선이 날아온다. 일본 식민주의의 첨병들이 공정할 리 없고 공정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과거에 관해서도 자기 비판적인 낌새를 보이면 공격적 시선이 날아온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해져 떠돌다가 굶어 죽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하건만, 지방장관이 된 자들은 호의호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다산의 ‘목민심서’ 서문에 보이는 이 대목은 당대 현실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 걸까? 굶어죽은 시체의 대략적인 수, 지역, 시기, 분포 등에 대한 천착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호찌민의 집무실에 ‘목민심서’가 놓였다는 얘기를 곧잘 한다. 호찌민이 한문을 읽었다 하더라도 그 책을 어떻게 입수했을까? 베트남 전문가에게 문의했더니 자기도 관심을 갖고 조사해 보았지만 아직껏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일본어로 초역(抄譯)해서 총독부 산하 지방 관리들에게 읽게 했다는 사실은 별로 얘기되지 않는다.

각종 소아병이 갈등 키워

우리 사회에는 좌익 소아병(小兒病), 우익 소아병, 그리고 좌우 양변에서 두루 발견되는 민족 소아병이 뿌리 깊어 사회 갈등 격화를 조장하고 있다. 이들 소아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성숙한 선진사회로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치지도자는 독선적인 메시아 콤플렉스 환자가 아니다. 불행한 과거에서 유래한 각종 소아병 증세의 동원과 활용을 철저히 배격하고 그 치유를 모색하는 따뜻한 통합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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