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피천득의 ‘순수’

  • 입력 2007년 5월 28일 03시 05분


‘국민 수필가’ 피천득은 자신이 태어난 5월을 좋아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수필 ‘오월’ 중에서) 그는 평생 소년으로 살았다. ‘나는 잔디 밟기를 좋아한다. 새로 나온 나뭇잎 만지기를 좋아한다.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의 일부) 자신이 썼던 글과 같은 삶을 살았던 ‘오월의 소년’이 5월의 끝자락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70년대 중반에 절필을 선언했다. “어느 날 보니 내가 전보다 못한 글을 쓰고 있더라. 그래서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울대 교수직을 정년 1년여 앞두고 그만뒀다. 태생적으로 순수함과 겸손, 초탈함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볼 일은 아니다. 그의 인생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식민지 지배와 전쟁 같은 현대사의 굴곡에 부닥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가 등단했던 1930년대 초는 식민지 지배하에 현실 참여적 문학과 순수 문학이 대립하던 시절이다. 여기에서 그는 서정(抒情)과 순수의 길을 택한다. 그의 글에 아릿한 아픔이 담겨 있는 것은 엄혹한 현실을 딛고 얻어 낸 순수였기 때문일 터이다. 문학의 역사에서 ‘현실’과 ‘순수’는 반복된 적이 많았다. 현실 참여파가 한동안 힘을 얻고 나면 다음에 순수파가 돋보이는 식이었다. 이념 과잉과 물질 만능의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그의 글에서 더 진한 감동을 얻는지 모른다.

▷1910년 태생인 그는 “너무 오래 살아 민망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도 피천득 선생이 살아 있어요?’ 하고 묻는 말이 짐이 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문인 가운데 100세를 넘긴 분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는가. 그가 100세를 불과 3년 남겨두고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쉽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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