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이런 싱거운 얘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요즈음 국가가 스스로의 안전조차 지키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이건 불안한 일이다.
근대 국가란 막스 베버의 말을 빌리면 지배수단으로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에 성공한 공공 조직이다. 오직 임금이 있는 서울을 향해 중앙집권적 ‘회오리바람의 정치’(G 헨더슨)가 판을 친 우리네 역사에선 그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분권주의 봉건제가 오랫동안 지배해 온 유럽에선 사정이 달랐다.
‘재벌총수 범법’ 경찰이 비호
가령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궁정 악사로 있던 ‘궁정’은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이었다. 그런데도 잘츠부르크의 성채에는 가톨릭의 대주교구에서 사용하던 무시무시한 각종 고문 기구가 지금껏 잘 보존돼 관광자원도 되고 있다. 조그만 바덴 공국(公國)의 하이델베르크 성에도 그런 고문 기구 전시실이 있다. 분권화된 지배 권력의 ‘물리적 폭력 행사’가 분산돼 있었음을 보여 주는 실례들이다.
‘권력’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지배를 뒷받침해 주는 물리적 폭력, 그를 독점한 근대국가는 봉건시대처럼 지배수단의 분산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정권과 사법권, 군대와 군 장비, 그리고 경찰조직과 형벌조직 등 일체의 물리적 폭력 행사 수단을 독점한다. 그런 국가가 비로소 외부의 폭력이나 내부의 사사로운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켜 준다. 그런 믿음에서 우리도 국가의 법과 질서를 지킨다.
공화제(res publica)의 본질은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권력을 ‘공유물(res publicae)’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건 ‘짐(朕)이 곧 국가’라 뇌까리며 지배 권력을 ‘사유물(res private)’로 여긴 군주제와 구별된다.
몇 주째 세상을 뒤숭숭하게 한 재벌 총수의 보복폭행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폭력 행사의 권력을 한 재벌 총수가 사적인 보복을 위해 찬탈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기 때문에 우리를 구속도 하는 답답한 국가 안에서는 내 가족이 설사 부당하게 살상당해도 가해자에게 보복할 권리는 내게 없다. 재벌 총수에게도 없다.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물리적 폭력은 오직 국가만이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이 국법의 질서다. 그러한 국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폭력 행사를 독점한 한 기관이 경찰이다.
이번 사건의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개인이 물리적 폭력 행사의 권력을 찬탈하여 국법 질서를 깨뜨린 데 그치지 않고 그런 범법 행위를 국법 질서를 지키는 최일선 기관인 경찰의 상층부가 되레 은폐하고 비호하려 했다는 점이다.
재벌 총수의 보복 사형(私刑)은 국가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는 일이다. 그런 사형을 경찰이 비호한다는 것은 더더욱 국가 자체를 무력화하는 일이다. 우리를 안과 밖의 폭력으로부터 지켜 주는 국가의 무력화―그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폭력시위도 국법질서 흔들어
하지만 논의의 공정을 위해선 국가의 무력화를 꾀하는 사회 폭력엔 또 다른 쪽의 폭력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될 것이다. 각종 명목의 가두시위 때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경찰을 공격하고 상해하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권위와 국법질서를 무시하거나 무력화하는 사회 폭력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사회의 폭력 앞에 경찰의 무력이 노정된다는 것은 국가의 권위, 국가의 질서, 아니 국가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한낱 경찰 총수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원수,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중대 사안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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