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유명인 중에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내 대답은 늘 같다.
“조용필, 이봉주!”
나는 조용필 콘서트에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를 바라고 이봉주의 달리는 모습을 거리에서 지켜보고 싶다. 그런데 마음만 굴뚝같았지 둘 중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바람을 가진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언젠가는 진짜로 그럴 거니까. 그런데 이제는 약간 조급해지는 게 사실이다. 이들이 나이를 먹고 있으니. 어쨌든 내가 이들을 좋아하는 건 자기 분야에서 저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봉주를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또 놓쳤다. 3월 18일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 이봉주는 이 대회에서 역전에 성공하며 우승했다. 마라토너로서는 환갑이라는 나이 37세에 이루어 낸 쾌거다. 작고 마른 이봉주가 월계관을 쓰며 웃었다. 주름살이 환하게 밀려나며 순해 보이는 눈이 가늘어질 때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그리고 박수를 쳐 주었다. 그에게는 박수가 아깝지 않다.
어렸을 때 내가 유일하게 했던 운동은 달리기였다. 결핵 때문에 약을 한 움큼씩 먹으면서도 육상선수로 남았던 건 달리기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육상으로 미래를 꿈꾼 건 더더구나 아니었다. 그저 다른 애보다 잘 달렸기 때문이고 선생님이 무서워서 싫다는 소리를 못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경험으로 나는 출발선에서 발바닥이 긴장하는 느낌, 아득하게 비워진 코스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옆 선수를 따라잡고 내 가슴이 쭉 내밀어질 때의 희열을 알게 됐다. 그리고 대학생이었을 때 처음으로 마라토너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연히 청소년 마라토너들을 봤을 때였다. 군살 없고 작은 체구의 선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을 지나쳐갔다. 발소리조차 없이.
“아, 나는 것 같아!”
나는 힘들 때마다 “한 템포만 더!”하고 주문을 외곤 한다. 다른 선수와 나란히 달릴 때 한 템포만 더 빠르면 앞 선수를 제칠 수 있고, 고통이 희열로 바뀌는 걸 경험한 까닭이다. 그래서 이봉주가 40.61km 지점에서 역전한 것에 대해 맘껏 어린애처럼 박수를 쳐 줄 수 있었다. 기계적이던 보폭에 순간 빠른 템포를 가하는 일은 놀라운 도전이다. 그건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제 몸을 충분히 이해하고 운용할 줄 아는 자만이 가능하다. 나는 이봉주가 그걸 해내서 기쁘고, 설사 그렇지 못했다 해도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다. 이봉주는 늘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믿으니까.
두 발로 걷는 인간이 두 발로써 비상하는 게 마라톤이다. 이봉주는 그걸 잘 보여 주는 사람이다. 그는 반짝 스타가 아니라 마라토너의 삶을 곡진하게 보여 주는 프로다. 이봉주는 분명 기록 보유자이지만 최고 기록보다는 실패한 기록이 더 많고, 완주를 못한 경우도 있고, 언론의 관심을 못 받을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달린다. 주위의 관심이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견뎌 내고 있다.
기록이 가장 좋을 때 은퇴해도 누가 뭐라지 않을 텐데 달리고 또 달리는 사람. 카메라 플래시보다는 자신의 여건에서 한계를 넘으려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 아마 이봉주는 나중에 자신의 기록을 깨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기록보다 완주를 목표로 삼을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그에게 마라톤은 삶의 방식인 듯하다. 고집스럽게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그가 아름답다.
이봉주는 유난히 주름살 많고,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순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활짝 웃으면 미소가 더없이 빛나는 사람이다. 그의 웃음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틀림없이 그가 오랜 시간 몸으로 보여 준 마라토너로서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유행에 저울질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이끌고 있는 그가 아름답다. 그래서 나는 언제라도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약삭빠르게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은 그에게 꽃 같은 아들이 태어나고, 깊은 주름살과 어수룩한 표정에서 뜻밖의 놀라운 웃음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행운이 아니다. 그가 견뎌낸 시간의 선물이다. 그래서 그는 진정 아름다운 마라토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졌으면 싶다. 자기 분야에서 저만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남는 진정 빛나는 별이니까.
황선미 동화작가
이봉주 “동화 많이 읽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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