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북한의 남침이 있었던 1950년. 그것은 몹시도 무덥고 해맑은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그해 6월에 들어서면서 북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대남 평화공세가 바짝 가열되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6월 7일에 평화통일제안을 발표한 북은 그 제안을 전달하기 위해 3명의 연락원을 38선을 넘어 철길 따라 남측에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6월 11일 연락원은 남쪽으로 넘어오자마자 체포되었고 체포되자마자 전향 성명을 낸 것으로 기억된다.
북의 이런 평화 공세에 맞서 남의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북진통일’의 요란한 양철북을 울려 대고 있었다. 제대로 갖춘 군비도 없이 무력통일을 정치 수사로만 떠벌리던 남을, 만반의 군비를 갖춰 놓고 평화통일을 역시 정치 수사로만 떠벌리던 북이 돌연 공격해 온 것이다. 전쟁의 기습이었다.
6월엔 돌발사건 유난히 많아
1953년 한반도에서 전쟁의 포연은 멎었으나 남북 대치는 계속됐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돼 갈 무렵 1972년 6월 내내 이상한 소문이 감돌더니 며칠 후 돌연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아무도 꿈조차 꾸지 못한 사이에 남의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월북해서 김일성을 만나고 북의 내각 부수상이 역시 비밀리에 월남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는 느닷없는 발표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때려잡자 김일성!’이 그래서 하루아침에 ‘김일성 주석’으로 격상되던 당시 나는 전쟁만이 아니라 평화도 당돌하게 덤벼 오는가 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김일성 주석’은 이내 다시 ‘때려잡자 김일성’으로 복원되고 말았다. 7·4남북공동성명, 그것은 ‘평화의 기습’이라고 나는 적었다.
통일을 앞세우다 보면 무력통일이건 평화통일이건 서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기습작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선건설, 후통일’의 구호 밑에 산업화를 추진했던 개발정책에는 기습작전이 별로 효험이 없는 것일까. 자본 축적이나 경제 성장은 기습으로 쟁취할 수는 없다. 그사이 한국 경제는 ‘2차 대전 후 제3의 경제기적’ 또는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정치는 이른바 ‘개발독재’의 그늘에서 저미(低迷)했다. 유신 말기와 신군부의 초기, 민주화는 후퇴하고 인권은 중세기적인 탄압에 신음했다. 물론 시민사회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갈수록 해일처럼 세력이 거세져 갔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과 마침내 신군부가 백기를 든 6·29 민주화선언, 그것은 시민 세력에 대한 신군부의 전면 투항이었다. 나는 그걸 ‘민주화의 기습’이라고 불렀다.
기습은 언제나 그 주체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마련인가. 6·29의 기습을 통해 오히려 신군부가 민주주의의 법의(法衣)를 걸친 첫 민선 정부를 출범하게 된다.
또 다른 6월의 기습은 새 세기가 열린 2000년에 있었다. 6·15남북공동선언, 그것은 평화의 기습도 통일의 기습도 아니었다. 다만 ‘한반도의 양국체제’를 국빈 영접용 빨간 카펫 위에서 남북 정상이 성대하게 내외에 시위한 이벤트. 말하자면 ‘분단체제의 첫 공식화의 기습’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현실성의 기습. 환상 속에 묻혀 참모습은 보지 않으려 했던 ‘한 민족 두 국가’ 체제라는 현실성의 기습이었다.
6·15선언은 국내외 과시 이벤트
6·15공동선언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평화가 공고히 되고 통일이 앞당겨졌는가. 북의 선군 정치, 로켓 개발과 핵실험, 그리고 최근 평양서 열린 6·15선언 7주년 기념행사의 파행적인 진행….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선언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내놓고 많은 전문가가 떳떳하게 제대로 시간을 들여 심사숙고한 끝에 마련한 조약이 아니라 몇 사람이 밤도둑처럼 숨어서 A4 용지 한 장도 못 채우는 빈약한 내용을 성급히 후려갈긴 기습 선언이 무슨 큰 변혁의 기둥이 된다는 말인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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