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기자와 법의관실 직원, 경찰서 인턴을 경험한 여성작가 퍼트리샤 콘웰이 쓴 ‘법의관’은 미국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의 모태로 알려질 만큼 사실적인 묘사와 치밀한 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여성 법의관 스카페타가 잔혹한 미지의 연쇄살인범과 벌이는 두뇌 싸움에는 첨단 법의학적 지식이 총동원된다. 시체 상태와 현장 상황을 통해 사건 윤곽을 파악한 뒤 시체를 부검대로 옮겨 메스와 레이저 광선으로 사인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미세 증거를 찾아내며, 혈액과 섬유 등 중요 물질을 분석하고 감정하는 일련의 절차는 잘 만들어진 과학수사 교과서를 보듯 정확하고 현실적이다. 공지영과 애거사 크리스티를 섞어놓은 듯 섬세한 심리묘사와 절제된 여성주의적 관점이 치밀한 추리 구조와 잘 어우러져 색다른 재미를 준다.
갑작스레 죽은 남자 법의국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스카페타는 성공한 젊은 여성이 그렇듯 편견과 질시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전문직 여성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는 희대의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희생자 중 한 명은 스카페타가 외래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병원의 인턴이다 보니 피해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범인 찾기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게 된다. 스카페타는 미국 연방수사국(FBI) 프로파일러(범죄분석요원)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강력계 형사의 도움을 받아 엉킨 실타래를 풀듯 범인의 윤곽을 조금씩 밝혀낸다. 여기에다 하이에나처럼 사건 주변의 비밀스러운 냄새를 맡고 곤혹스러운 폭로기사를 써대는 여기자, 위선과 자만에 가득 찬 장관, 묘한 매력과 어두운 비밀을 함께 지닌 검사와 공적 사적으로 애증과 갈등 관계를 조성하며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당겨진 활시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주인공 스카페타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지녔거나 천재적인 발상을 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고뇌와 갈등,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와 인간적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현실적이며, 남녀를 떠나 동감하고 동정하며 동일시하기 쉬운 인물이다. 1990년에 원작이 출간된 ‘법의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지난 17년간 눈부신 발전과 급속한 보급이 이루어진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에 대해서는 잊는 게 좋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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