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15>환상의 여인

  • 입력 2007년 7월 2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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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이 기준을 정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더불어 ‘세계 3대 걸작 추리 소설’로 꼽힌다. 뒤의 두 작품이 범인의 의외성이라든가 기막히게 특이한 살인 설정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환상의 여인’은 로맨틱 스릴과 서스펜스, 흥분을 자아내는 데 단연 최고의 솜씨를 발휘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아내와 크게 싸운 헨더슨은 우연히 마주친 오렌지색 모자를 쓴 낯선 여인과 함께 몇 시간을 보낸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끔찍하게 살해된 채였고, 그는 곧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놀랍게도 그날 밤 오렌지색 모자의 여인과 함께 들렀던 모든 장소에서 마주쳤던 이들은 ‘그런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온다. 그 전에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여자를 찾아 대도시의 한복판을 질주해야 한다.

아이리시는 ‘진짜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선 아예 범인이 주인공으로 나서거나, 누명을 뒤집어쓴 평범한 남녀가 필사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진범을 찾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라든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등 고전적 탐정들이 정교한 이성적 추리로 승부를 가렸다면 아이리시의 주인공들에겐 곰곰이 생각해 볼 잠깐의 여유조차 없다. 관찰과 이성이 아니라 남들보다 한발 빨리 다음 장소로 넘어가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지고, 이런 행동의 전환으로부터 가장 순수한 서스펜스가 빚어진다. ‘환상의 여인’을 읽을 때에도 독자의 입장에선 ‘헨더슨의 아내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보다는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을 찾을 수 있을까’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말 부분에 이르러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진범이 밝혀지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건이 해결되고 난 뒤 헨더슨은 이 악몽 같은 경험에서 뭔가 ‘배울 만한 점’이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마치 헨더슨이 했던 모든 선택이 이미 예정된 끔찍한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도 ‘사건을 해결했다’는 청량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불안과 의혹만이 희미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의 여인’은 불가해한 세계 속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개인이 느끼는 절실한 패배감에 관한 소설이다. 만일 프란츠 카프카가 추리소설을 썼다면, 혹은 화가 에드워드 하퍼가 붓 대신 펜을 들었다면, 단언하건대 아이리시처럼 썼을 것이다. ‘환상의 여인’을 처음 읽고 카프카나 하퍼의 느낌을 받았다면 아이리시의 또 다른 작품 ‘상복의 랑데부’와 ‘죽은 자와의 결혼’도 함께 읽어 볼 만하다.

김용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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