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으로 도피한 연암은 1780년(정조 4년) 친척 형인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한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소중화(小中華) 사상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쟁에 골몰하던 조선사회에서 청국기행은 개벽(開闢)과도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러허(熱河)와 베이징(北京)의 신문물을 본 느낌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비판과 개혁 방향을 제시한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다.
▷‘허생전(許生傳)’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한문소설이다. 남산골에 사는 허생은 변씨(卞氏)한테서 빌린 금 10만 냥으로 장사를 해 거금을 모은다. 그는 이 돈을 백성에게 다 나눠 주고 20만 냥을 변씨에게 갚은 뒤 변씨 등과 함께 경세치국(經世治國)을 논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매점매석’인 허생의 치부술(致富術)과 부국이민(富國利民)의 근대적 경제관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연암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연암의 산문을 번역해 최근 ‘연암산문정독’을 펴낸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연암을 ‘조선의 셰익스피어’라고 평했다. 영국인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자부하는 셰익스피어만큼 심오한 사유와 글맛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연암은 북학파의 거두이자 개혁적 사회사상가로선 많이 알려졌지만 박 교수의 이번 번역 노작(勞作)은 문장가 연암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 한여름 밤에 연암의 그윽한 산문세계에 빠져 보면 어떨까.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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