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성희]대문호 연암(燕巖)

  • 입력 2007년 7월 25일 02시 44분


“진채(陳蔡) 땅에서 곤액(딱한 사정)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중략)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 줌이 어떠하실까?”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이 친구 박제가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다. 여러 날 굶었으니 돈을 꿔 달라는 부탁인데 이왕 돈 꿔 주는 김에 술도 보내라는 내용인즉, 그 은유와 해학이 놀랍다.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으로 도피한 연암은 1780년(정조 4년) 친척 형인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한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소중화(小中華) 사상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쟁에 골몰하던 조선사회에서 청국기행은 개벽(開闢)과도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러허(熱河)와 베이징(北京)의 신문물을 본 느낌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비판과 개혁 방향을 제시한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다.

▷‘허생전(許生傳)’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한문소설이다. 남산골에 사는 허생은 변씨(卞氏)한테서 빌린 금 10만 냥으로 장사를 해 거금을 모은다. 그는 이 돈을 백성에게 다 나눠 주고 20만 냥을 변씨에게 갚은 뒤 변씨 등과 함께 경세치국(經世治國)을 논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매점매석’인 허생의 치부술(致富術)과 부국이민(富國利民)의 근대적 경제관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연암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유주의자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연암의 산문을 번역해 최근 ‘연암산문정독’을 펴낸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연암을 ‘조선의 셰익스피어’라고 평했다. 영국인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자부하는 셰익스피어만큼 심오한 사유와 글맛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연암은 북학파의 거두이자 개혁적 사회사상가로선 많이 알려졌지만 박 교수의 이번 번역 노작(勞作)은 문장가 연암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 한여름 밤에 연암의 그윽한 산문세계에 빠져 보면 어떨까.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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