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31일 정년퇴직 앞둔 서울대 국사학과 정옥자 교수

  • 입력 2007년 8월 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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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직을 앞둔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시집가고 10년 뒤에 ‘아줌마가 무슨’이란 구박을 받으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 모교 교수가 돼 원없이 공부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면서 “내가 원래 말없는 성격이었는데 교수하면서 제자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수다스러워진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활짝 웃었다. 이훈구 기자
정년퇴직을 앞둔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시집가고 10년 뒤에 ‘아줌마가 무슨’이란 구박을 받으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 모교 교수가 돼 원없이 공부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면서 “내가 원래 말없는 성격이었는데 교수하면서 제자들을 즐겁게 해준다고 수다스러워진 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활짝 웃었다. 이훈구 기자
“조선시대때도 王이 못나면 측근들이 설쳤죠”

“현 정부를 민주화운동의 그림자라고 생각해요. 운동에 치우쳐서 제대로 된 공부를 못 했고 그러다 보니 정권을 잡았어도 의욕만 앞서지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거예요.”

31일 정년퇴직하는 정옥자(국사학) 서울대 교수는 작심한 듯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처하는 현 정부를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서른아홉 늦깎이로 1981년 서울대 교수가 된 정 교수는 ‘운동권의 소굴’ 중 하나였던 국사학과 ‘문제 학생들’의 지도교수였다. 그는 당시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빨갱이’로 낙인찍히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던 교수 중 한 사람이었다. 국사학과 학생대표로 뽑혔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아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제자들이 시위에 앞장서거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위장취업에 나서 수업을 팽개쳤을 때도, 그래도 학업은 마쳐야 한다며 눈물로 호소한 교수였다. 그 역시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덕여고 학생회장으로 학생시위에 앞장섰기에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울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가 정년퇴직한다고 하니까 81학번 제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얼마 전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그만 기념파티를 열어 줬어요. 다들 생업에 바빠 얼마나 모이겠나 싶었는데 당시 정원 20여 명을 꽉 채울 만하게 나타났어요. 다들 1980년대를 회상하면서 수업을 빼먹고 잘못한 것은 자기들인데 교수님이 왜 그렇게 저희들을 붙잡고 우셨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정 교수는 1986년 서울대 교수들이 전두환 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펼칠 때 이를 주도한 ‘배후’이기도 했다.

“정부에 의해 학생들의 정당한 주장이 탄압받고 교권이 무너지는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해 4년 후배였던 동양사학과의 이성규 교수와 서명운동을 ‘모의’했지요. 둘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하도 붙어 다니니까 주변에서 선후배 간에 바람났느냐고 놀려대기도 했어요.”

정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이후 서명서 문안을 작성한 것은 이성규 교수와 정운찬 경제학과 교수, 임현진 사회학과 교수였다. 그렇게 작성된 서명문에 첫 서명을 한 이가 정 교수였다.

“여자인 제가 처음 서명을 해야 남자들이 부끄러워서라도 동참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맨 먼저 서명했어요. 하지만 1700여 명의 전체 교수 중 서명에 참여한 교수는 처음에 49명에 불과했어요. 당시 그 많은 남자 교수가 어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는지 저는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는 이런 사연의 일단을 동아일보 칼럼 ‘민주화운동은 계급장이 아니다’(8월 2일자)에서 밝히면서 “손톱만 한 민주화운동의 전력이라도 팔아 공을 보상받겠다고 나서는 이 부박한 세상이 허망하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그 허망함에는 서명운동에 참여했다가 역풍을 겪은 가족사의 아픔도 숨어 있었다. 정 교수는 자세히 밝히기를 꺼렸지만 멀쩡하던 남편의 사업이 타격을 입었고, 그것이 화근이 돼 남편은 병으로 쓰러졌고 둘째 아들은 고교를 중퇴한 뒤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했다.

그에게도 ‘빨갱이’라는 낙인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그의 삶에 이것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아는 이는 드물었다. 네 자매 중 맏이였던 그는 6·25전쟁 중 여덟 살 나이로, 피란길에서 절망한 아버지가 어린 세 동생을 껴안고 자신의 눈앞에서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피눈물 어린 가족사를 갖고 있다.

정 교수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두 아들을 낳은 뒤 다시 학업에 뛰어들어 부끄러움의 대상이던 조선의 역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새롭게 각인시키는데 일조한 학자다. 오늘날 각광받는 ‘18세기 조선’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군사(君師)라 불릴 만큼 신하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출중한 군주가 속출했기 때문입니다. 숙종-영조-정조가 바로 그런 학자 군주였습니다. 그들은 세자 때는 서연, 왕이 된 뒤에는 경연을 통해 당대 최고의 학자 아래서 조강, 주강, 석강이라 해 하루 세 차례씩 학문을 연마했기에 신하들을 압도할 역량을 갖췄습니다. 그런 왕들에 비하면 오늘날 천민자본주의 아래 민주정부의 대통령은 막대한 권한만 누릴 뿐 제대로 된 의무를 수행한다고 할 수 없죠.”

최근 청와대 참모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대변해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을 겨냥한 매서운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조선시대 역사를 봐도 왕이 똑똑하면 정승과 판서가 활약하고, 왕이 못나면 승정원이 설치기 마련입니다.”

원래 문학소녀를 꿈꿨던 정 교수는 퇴직 후 고향 강원 춘천에 마련한 집필실에서 학술서가 아닌 ‘쉽고 재밌고 즐거운 옛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가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보따리에는 청와대 386참모들이 어쭙잖게 꿈꾼 정조의 진면목을 담은 평전도 들어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얽힌 체험담도 담길 예정이라고 했다.

:정옥자 교수:

△1942년 강원 춘천 출생 △1965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1977년 서울대 대학원 석사 △1988년 서울대 대학원 박사 △1981∼2007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999∼2003년 규장각 관장 △저서로는 ‘조선후기 문화 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등의 논저와 ‘역사에세이’ ‘역사에서 희망읽기’ ‘오늘이 역사다’ 등의 역사칼럼집이 있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이 기사의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이재하(23·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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