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비판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무고한 민간봉사자들을 납치·살해하면서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일당의 잔인무도함을 보면서 우리는 종교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신앙의 미명 아래 사람의 목숨을 도구화할 수 있는가. ‘당신들의 신’은 그렇게 가르치는가.
그러나 탈레반의 저편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이슬람 신자가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원래 ‘이슬람’이라는 이름 자체가 평화라는 말에서 왔다. 그런 이슬람의 신자들이 보기에 탈레반 원리주의자들은 알라신과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정면에서 배반한 광신적 극단주의자들과 다름없다.
아프간 인질사태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적되는 한국 개신교의 전투적 선교 관행도 교회 밖으로부터의 비판과 교회 안의 자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한국 기독교의 융성이 지나친 팽창주의와 선교 경쟁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지의 문화전통과 현지인들의 정서에 저촉되는 무리수를 범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알라의 배반자
종합적으로 이번 아프간 사태는 인간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세계 곳곳의 교회와 절, 그리고 모스크 등에서 오늘도 많은 종교인이 믿음을 가꾸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왜 갈등과 싸움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종교 자체의 폐쇄성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와는 무관한 다른 이유가 있는가. 또는 아름다운 신앙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인가. 위태로운 중동 정세 속에서 빈발하는 자살폭탄테러를 비난하는 외부 논자들이 암시하듯이 특정 종교 안에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리가 과연 존재하는가.
강력하고 때로 설득력 있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종교 현상이 위축되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람에게 특유한 궁극적 관심이다. 즉, 인간은 ‘나는 왜 사는가’라고 물으면서 삶의 유한성과 세계 속에 가득 찬 고통에 대해 궁극적 의문을 갖는 존재라는 것이다. 과학은 세계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삶의 비밀 모두를 해명해 주지는 못한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이런 궁극적 관심을 공유하는 한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지니는 이런 의미의 종교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의 진지한 정신적 관심에 찬물을 끼얹는 제도종교들의 행태는 참된 신앙의 이름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는 것이 정의와 사랑의 신이 내리는 명령이라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고난과 아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신앙의 이름으로 또 다른 고통과 슬픔을 가져오는 것이 과연 종교가 할 짓인가.
그러나 특정 종교(예컨대 이슬람교)의 교리 자체가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일부 서양 논객들의 주장은 역사의 복합성을 단순화시킨 궤변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보듯 특정한 지방의 종교가 세계 종교로 승화되어 가는 궤적은 교리의 보편적 호소력과 실천의 관용성이 함께 증대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종교 교리 자체가 폭력을 조장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탈레반이나 십자군의 경우에서처럼 종교가 정치싸움이나 권력투쟁과 연결될 때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앙이 동원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국의 종교는 평화 만드는가
돈과 권력을 좇아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논리로부터 한국의 종교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여러 종파가 다투어 화려한 성전을 짓고 천문학적인 신자 수를 자랑하는 만큼 우리 사회는 인간화되고 화평한 곳이 되었는가. 제도종교 바깥의 공간이 점차 합리화되어 가고 투명해지는 것에 비례해 종교 안의 관행들도 변화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종교인이 늘어날 때 종교는 한갓 망상이 아니게 될 것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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