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정보와 보안

  • 입력 2007년 9월 4일 03시 01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초기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어로활동 중이던 남한 어선을 납치해 갔다. 북측은 배를 황해도 한 항구에 정박시킨 채 어부들을 조사하면서 수시로 상부에 보고했다. 우리 군(軍) 정보기관은 암호로 된 무선(無線) 감청 내용을 풀어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국방부 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 중계방송을 하듯 감청 내용을 구체적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국방부 장관의 실수는 당시 거의 무선 감청에 의존하던 대북(對北) 정보수집 활동을 한동안 무력화했다. 북측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실에 놀라 암호체계를 바꿔 버린 것이다. 1983년 다대포 무장간첩 생포사건 때는 침투 한 달 전에 정보를 입수해 훈련된 특수요원들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개가를 올렸다. 당국은 무선 감청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해안을 지키던 초병이 백병전 끝에 생포했다’고 꾸며 발표했다.

▷암호체계를 풀지 못해 적의 동향을 캄캄하게 모르고 있는 상태를 정보기관에선 ‘무선 침묵’이라고 부른다. 적의 동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적에게 알려지는 것 자체가 정보기관에선 보안사항이다. 국가정보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部訓)은 정보와 보안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정보의 세계에선 업무내용은 물론 구성원의 신분과 신원도 비밀에 속한다. ‘××문화사 상무’ ‘○○공사 전무’ 등으로 흔히 자칭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탈레반과의 인질 석방 협상을 현지에서 지휘한 김만복 국정원장의 노출과 보도자료 발표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장임을 망각한 일탈 행위다. 몇 차례 등장한 ‘검은 안경의 사나이’도 마찬가지다. 테러단체와의 협상에 국정원장이 직접 관여하고 있음을 세계에 널리 알려 나라 체면을 깎아 놓았다. 아무리 공적을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더라도 국정원장이 공개적으로 나설 일은 아니었다. 공명심과 정보기관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끝까지 음지를 지켜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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