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통령, 석 달간의 下山法

  • 입력 2007년 9월 17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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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는 2002년 대선 뒤에 인사(人事)가 필요했던 몇몇 차관급과 산하단체장 인사권을 노무현 인수위에 넘겼다. 그러나 당선자 측은 “그냥 현직 대통령이 인사를 하시는 게 좋겠다”며 반납했다. 2008년 2월 노 대통령이 퇴임하는 순간까지 ‘단 한 톨의 곡식도 남기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표시라고 당시 DJ 측은 해석했다(인수위는 그 뒤 노 대통령 취임 전에 일부 인사권을 행사했다).

전윤철 감사원장과 정상명 검찰총장의 임기가 오는 11월에 끝난다. 이들의 후임자 임명 문제에 대해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15일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견해를 밝혔다. ‘12월 대선 이후엔 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 차기 정부에서 일할 요직의 인사권은 행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후보는 “현 정부가 저질러 놓은 것을 그대로 다음 정부에서 하면 부채가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코드의 정책으로는 경제 활성화, 민생 회복, 재정 건실화 같은 숙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 후보의 지론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유 중의 하나다.

次期할 일까지 못질하려는 客氣

하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넘어 후대 정부의 정책에까지 “말뚝을 박고 대못을 박고 싶다”고 외친다. 12일 제주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해서는 “(현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어느 정부도 흔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며 “(다음 정부에서도 지금의) 정책을 지킬 지방의 시민조직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다.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바꾸려 한다면 시민저항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주문 같다.

경제정책뿐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생각을 드러냈다. “전임 사장이 발행한 어음은 후임 사장이 결제하는 거다. (임기가) 두 달이 남았든 석 달이 남았든 내가 가서 도장 찍어 합의하면 후임 사장이 거부 못한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코드를 시대정신이라 규정하며 국가경영을 독불장군 식으로 해 왔다. 그것도 모자라 경제정책이건 대북관계건, 다음 정부까지 자신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일을 벌여놓겠다는 얘기다.

마침 지난주 서울에 온 세계적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는 한국 대선과 관련해 “차기 대통령은 무조건 자신의 신념대로 밀고 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유연성 있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과잉 신념’을 염두에 둔 지적일 것이다.

아무튼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노선과 정책을 바꿀 수 없다면 5년마다 새 대통령을 뽑을 필요도 없다. 노 대통령은 5년 전의 유권자 선택을 근거로 ‘노 코드=시대정신’이라고 내세웠다. 그렇다면 3개월 뒤에는 새 대통령 당선자가 새 시대정신을 대표해야 맞다. 그 선택의 장(場)이 곧 대선이다. 그리고 이미 국민은 희망을 다음 정부에 걸고 있다.

노 정권 사람들의 언론 탓, 야당 탓, 심지어 국민 탓을 말릴 수는 없지만 엄연한 사실은 ‘노무현 국정’을 지지하는 국민이 20% 안팎에 그친다는 점이다. 노무현적인 것에 대한 부정(否定)이 새 시대정신이라고 등식화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형편이 이런데도, 사실상 석 달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하산(下山) 길에 새삼 ‘등산 모드’로 신발 끈을 매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여권(與圈)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차기 대통령이 ‘노 코드’를 고스란히 따르고 싶어 할 것으로는 상상되지 않는다. 지난 5년의 참담한 실패를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 잠근 단추는 풀고 다시 잠가야 문제가 해결된다.

국민 설거지거리 그만 만들어야

노 대통령이 퇴임 후의 입지를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럴수록 설거지거리를 더 만들어 다음 정부에 넘기는 일은 지금부터라도 극력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내달 2일 평양에 갈 때도 이 점을 감안했으면 좋겠다.

자신은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그 설거지는 국민과 다음 정부에 내맡긴다면 퇴임 후 입지가 더 좁아질 것이다. 그런 이해타산 이전에 나라 흔들기로 5년을 지새운 정권이 마지막으로나마 국민에게 예의를 지키겠다면 더는 무거운 짐을 떠안기지 말 일이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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