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바로티를 자주 듣진 못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일찍이 듣고 가장 가까이서 들은 걸 자랑삼고 있다. 처음 듣기는 1966년 로마. 당시 31세의 파바로티는 아직 밀라노의 스칼라에 데뷔(1967년)하기 전이요, 뉴욕 메트의 데뷔(1968년)도 2년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그는 막 떠오르는 별로 로마 무대에 서서 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로 ‘리골레토’에 출연해 질다 역의 레나타 스코토와 함께 만토바 백작을 불렀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그때까지도 파바로티를 몰랐고 다만 스코토 때문에 비싼 표를 구입했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부른 “라 돈나에 모빌레…”는 이미 천하일품이었다.
뉴욕타임스에 장문의 추모사를 쓴 버나드 홀랜드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가 파바로티 목소리의 절정기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구경 복이 많은 사람이다. 그 절정기의 파바로티를 다시 1970년대 후반 거의 소리 소식 없이 찾아온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들었으니… 그때만 해도 표 값이 크게 비싸지 않아 나는 무대 바로 밑 좌석에 앉아 마치 하우스 콘서트 같은 지근의 거리에서 파바로티의 전 면모를 눈과 귀로 만끽할 수 있었다.
파바로티 목소리 팝과 잘 어울려
부엌에서 일하다 말고 급히 차려입고 나온 피자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싹싹해 보이는 파바로티는 어떤 고음의 오페라 아리아도 도무지 힘들게 부르는 법이 없었다. 들고 나온 흰 손수건을 꼭 쥐기만 하면, 무슨 마술의 손수건처럼, 아무리 높은 소리를 뽑아도 천의무봉이었다. 소문대로 ‘높은 C음의 제왕’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노래하고 나선 흰 이를 내보이며 씩 웃는 표정은 그의 시원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 줬다. 앙코르 추가 곡도 푸짐했다.
그 뒤의 파바로티는 온 세상이 다 안다. 월드컵이다 올림픽이다 하는 큰 행사 때마다 되풀이된 ‘스리 테너’ 공연과 TV 중계, CD와 DVD의 엄청난 보급은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이름을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알려 놓았다. 스리 테너 공연으로 클래식 음악을 대중에게도 널리 보급한 공은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파바로티를 세계의 ‘3대 가수’라 일컫는다는 건 못마땅하다. 나는 파바로티를 3대 가수가 아니라 당대 최고 가수로 치고 있다. 물론 도밍고를 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다투진 않는다. 취미의 차이라 믿기 때문이다. 찰떡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메떡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에겐 도밍고가 메떡이라면 파바로티는 찰떡이다. 나는 찰떡을 좋아한다.
파바로티는 비단 클래식을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해 준 데 그치지 않고 거꾸로 대중음악을 클래식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가 전쟁고아들을 위해 저명한 팝 가수들과 어울려 ‘파바로티와 그의 친구들’이란 이름으로 연 콘서트 음반을 나는 사랑한다.
세계 최고의 ‘벨칸토’가 루치오 달라, 엘튼 존, 존 오스본, 또는 라이자 미넬리 같은 팝 가수들의 시큼하게 쉬고 쇠고 텁텁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것을 들으면 놀랍고 신기하고 즐겁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엉뚱하게도 김치 생각을 한다.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김치, 머슴상에도 수라상에도 오르는 김치, 중국 탕면에도 피자에도 안심 스테이크에도, 아니 (내 창피한 실험으론) 케이크에도 다 어울리는 김치….
모든 음식과 잘 맞는 김치 떠올라
파바로티의 어울림이 ‘위로부터의 전략’이라면 김치의 어울림은 ‘밑으로부터의 전략’이라 할까. 그렇다면 김치 대신 참기름을 들어도 좋다. 파바로티를 생각하며 자꾸 먹을거리 얘기로 흘러가는 것은 좀 실례지만 거기에 빵집 아들 파바로티의 0.15t의 체구와 용모가 전혀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다. 파바로티와 먹을거리엔 다같이 ‘자연’의 풋풋한 내음이 풍기는 것만 같다.
어두운 지구를 잠시나마 밝게 해 주고 인간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해 준 음악가가 가 버렸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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